27세 '왕회장'손자 "폐지줍는 사람보면…"

27세 '왕회장'손자 "폐지줍는 사람보면…"

이경숙 기자
2013.02.02 05:58
구글 선호 매체 등록 구글에서 머니투데이 추가하기

[소셜디자이너열전]<19>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허브서울 공동대표

[편집자주]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설계사들이 있다. 이들은 불평등·환경훼손·인권침해·동물학대 같은 사회 문제를 사회적기업·협동조합·비영리단체·기업의 사회적책임 같은 활동을 통해 해소하자고 나선다. 사회를 바꾸는 아이디어의 실행자, '소셜디자이너(Social Designer)'들을 머니투데이가 소개한다.

재벌 후계자의 삶은 어떨까.

TV드라마 속 주인들처럼 친인척들로부터 경영권을 지키려 고군분투하거나, 아버지 때문에 꿈을 포기하거나, 신분 상승을 노리고 달려드는 여자들한테 마음을 줬다가 상처 받고 있을까.

드라마작가들이 갇혀 있는 상상력의 한계를 확 깰 만한 실존 캐릭터가 국내 재벌가에 등장했다. 정경선 사단법인 루트임팩트 대표(27) 겸 ㈜허브서울 공동대표다. 그는 고(故)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손자다.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장남이다. 회사 지분 15만1530주, 지분 0.17%를 보유하고 있는 유력 주주이기도 하다.

그는 후계자 자리에 집착하지도, 꿈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26세에 그는 사회 문제를 해소하는 사회혁신가들을 돕겠다는 꿈을 담아 사단법인을 만들었고, 27세엔 뜻 맞는 지인들과 함께 사회혁신가들의 협업공간을 열었다. 지난 29일 서울 삼성동의 허브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 겸 허브서울 공동대표 ⓒ홍봉진기자 honggga@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 겸 허브서울 공동대표 ⓒ홍봉진기자 honggga@

◇돈으로 안 되는 일 있다는 것 깨달아=서울 선정릉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허브(HUB)'는 북카페 같이 조용했다. 60여 평 공간에 7~8명의 젊은이들이 띄엄띄엄 앉아 각자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정 대표는 허브에 마이리얼트립 등 6개 창업팀이 들어와 있다고 설명했다. 마이리얼트립은 평범한 지역 토박이를 여행가이드로 연결해주는 청년벤처다. 그는 한동안 자기 사업마냥 진지하게 이 업체를 홍보했다. 그렇게 좋으면 직접 하지 싶을 정도로.

"제가 창의적이거나 혁신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능력 있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그 일에 온 마음을 다 하는 사람을 돕는 게 좋아요."

그가 군대 제대 후 고려대 경영학과에 복학했을 때 만든 대학생 문화 기획 동아리 '쿠스파(KUSPA)'도 그런 식으로 운영했다. 회원들한테 "내가 돈은 구해올 테니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아오라"고 했다. 악플러들의 손가락 끝을 자극할 만한 아슬아슬한 발언이다. 그의 부연 설명에 반전이 있었다.

"쿠스파를 하면서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펀드레이징(모금)할 때 성과를 구체적으로 전달하거나 전문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돈이 움직이지 않아요. 그래도 100번 지원하면 30~40곳은 만나주고 그 중 한두 곳은 사업을 후원해줘요."

역시 모금은 재벌 후계자한테도 힘든 일이었다. 그는 "다행히 언론의 이목을 끄는 좋은 기획이 나와서 모금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사람을 책 삼아 다양한 삶을 읽는 '휴먼라이브러리', 말 못할 고민을 서로 듣고 풀어주면서 자살 방지 기능을 하는 '포스트시크릿'이 쿠스파 회원들이 기획한 것이다.

쿠스파 경험 후 그는 사람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달았다. 2011년부터 1년 가까이 아산나눔재단 인턴 생활을 거친 후, 그가 직접 만들거나 모금을 지원한 조직들은 모두 사람을 키우는 곳이다.

루트임팩트는 사회혁신가를 키우도록 대기업이나 거액기부자들을 자문한다. 아쇼카코리아는 세계 최초, 최대의 사회적기업가 육성·지원조직인 아쇼카(Ashoka)의 한국 법인이다.

'허브'도 사람을 키우는 공간이다. 박동천 임팩트스퀘어 공동대표, 딜라이트의 김정현·김정헌 공동 창업자, 엔스파이어 김성민 대표 등 뜻이 맞는 자수성가형 청년기업가들과 함께 투자했다.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 겸 허브서울 공동대표 ⓒ홍봉진기자 honggga@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 겸 허브서울 공동대표 ⓒ홍봉진기자 honggga@

◇"아무 것도 아닌 나도 이거 하는데..."=인터뷰 중 그가 휴대전화에 찍힌 부재중 번호를 확인하더니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기부를 부탁했던 대기업의 비서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놓쳤다는 것이다. 재벌 3세인 그에게도 대기업 경영진은 쉽지 않은 '고객'인가 보다.

이런 일을 염려해 그의 부모는 그가 루트임팩트를 설립하는 것을 처음엔 완강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이랬다. '네가 번 돈도 아닌데 돈 끌어다 쓸 생각부터 하느냐. 아직 후계자 중 이런 일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여기저기 고개 숙이고 다니는 것을 우리가 보기 괴롭다.' 아들에게 늘 "남들을 배려하고, 올바르게 살라"고 가르쳤던 부모였다.

"맞는 말씀이에요. 아무리 가족이고 친척이라고 해도 그냥 돈을 내주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 같은 사람한테도 모금이 이렇게 힘든데 다른 사람은 어떻겠어요?"

결국 그의 고집에 부모가 졌다. 정몽윤 회장은 이제 루트임팩트의 가장 든든한 기부자이자 지원군이다. 그는 "제가 하는 사업은 사실상 가문의 사회공헌에 가깝다"며 "대기업 사회공헌이 할 수 없는 일을 개인기부자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 사회공헌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자기 기업이 발생시키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일만 하려 해도 모자라다"고 말했다. 게다가 기업이 손대기엔 사회엔 해소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다. 그는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아 해결책을 내놓는 사람을 돕는 건 개인기부자가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문의 형님들을 잘 설득해보려고요. 아무 것도 아닌 나도 이런 일 하는데 나보다 더 힘 있는 분이 하시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 아니에요?"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 겸 허브서울 공동대표 ⓒ홍봉진기자 honggga@
↑정경선 루트임팩트 대표 겸 허브서울 공동대표 ⓒ홍봉진기자 honggga@

◇풍족한 사람들도 자선사업을 하려면 남의 도움이 필요=앞으로 5년 동안 이루고 싶은 그의 목표는 두 가지다.

첫째, 웬디 콥이나 닥터 브이 같은 사회혁신가를 5명 배출하는 것. 웬디 콥은 티치 포 아메리카(TFA)를 세워 교육불평등을 해소하고 있다. 벤카타스와미, 일명 닥터 브이는 아라빈드안과를 세워 저소득층 백내장 치료에 기여하고 있다.

둘째, 기업의 의사결정자가 중심이 된 사회사업을 5건 이상 성사시키는 것. 그가 살면서 부모 외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는 빌 드레이튼 아쇼카 창립자가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현대가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의 모금활동 범위에도 제한을 준다. 현대가 후계자가 운영하는 사회사업에 다른 재벌가나 대기업에 기부금을 주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외국의 재벌가 사람들도 자선사업을 하면 그런 말을 듣는대요. 너는 잘 살면서 왜 남의 돈을 받으러 다니느냐고. 록펠러가 5세인 웬디 오닐이 그러더군요. '물론 우리는 풍족하지만 이런 일을 하려면 그 이상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십대 소년 시절 그는 '왜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괴롭힘을 당해야 할까', '왜 나는 폐지 줍는 분들을 보면 죄책감을 느낄까'라고 고민했다. 그 고민이 씨앗이 되어 소년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일이 하고 싶어 이 일을 한다"고 말하는 청년 사회사업가가 됐다.

"넌 착하지만 특이해"라고 한다는 그의 부모의 말처럼 그는 재벌가에선 '특이한 존재'다. 국내 재벌 후계자 중 전업으로 사회 문제를 해소하겠다고 뛰어든 사람은 없다. 자선가로 키워진 존 D.록펠러 2세, 유대인 10만 명을 구한 스웨덴의 라울 발렌베리처럼 한국의 재벌가에서도 특이한 존재가 나올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