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이 꽉 막힌 공정거래위원회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리점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대리점법) 시행에 따라 보험업계가 힘겨워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행권은 기한이익상실,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방문판매법) 등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금융권은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지만 공정위는 들어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 KEB하나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등 국내 17개 은행은 최근 은행여신거래기본약관(가계용, 기업용)을 개정하면서 '기한전의 채무변제의무' 관련 부분에 '공정거래위원회의 표준약관과 다르다'라는 표현을 삽입했다.
지난 10월 공정위는 은행여신거래표준약관을 개정하면서 대출의 기한이익상실 사유에서 예금의 가압류를 제외했다. 지금까지 은행은 대출자의 예금계좌에 가압류가 들어오면 기한이익상실에 따라 예금으로 대출금을 상계하고 나머지 대출금을 갚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표준약관처럼 약관을 바꾸면 앞으로 은행은 다른 채권자와 같이 소송을 걸어야 하고 예금을 비율대로 나눠 받아야 한다.
은행들은 예금계좌 가압류를 기한이익상실 사유로 인정해주지 않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전세계에서 유일하다며 반대했지만 공정위는 막무가내였다. 은행에 표준약관 개정안을 개별약관에 반영하라고 '사용 권장 요청' 공문을 여러번 보냈다. 하지만 은행은 공정위의 요청을 거부했다. 은행이 공정위의 사용 권장 요청을 거부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공정위는 표준약관에 따라 약관을 바꾸라는 ‘약관변경명령권’을 발동할 수 있지만 은행은 이를 따르지 않고 공정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입장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표준약관대로 시행하면 예금계좌를 고려하지 않고 대출을 취급할 수밖에 없어 대출금리가 상승할 수 밖에 없다"며 "공정위의 표준약관이 고객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정위가 은행권을 괴롭힌 대표 사례는 CD(양도성예금증서)금리 담합 여부 조사다. 공정위는 2012년부터 CD금리 담합 여부를 조사하다가 지난 7월 심의절차 종료를 결정했다. 사실관계 확인이 곤란해 법 위반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사실상 무혐의를 뜻한다. 공정위의 무리한 조사 때문에 은행권은 수십억원의 법률 자문비용은 물론 유무형의 손실을 봤지만 하소연할 곳도 없다.
방문판매법 개선도 금융권의 요청에 대해 공정위가 귀를 막은 대표적인 사례다. 방문판매법에는 ‘구매자가 판매 이후 14일 이내에 구매를 철회할 수 있다’는 조항에 포함돼 있다.
이 때문에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는 영업점 밖에서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상품을 판매할 수 없었다. 펀드 등 금융상품에 가입한 후 14일 이내에 원금 손실이 발생해 고객이 이를 철회하면 손실은 고스란히 금융회사 몫이 되기 때문이다. 금융권은 방문판매법 개선을 요구했지만 공정위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있다.
또 지난 8월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과 이종걸 의원이 금융투자 상품 방문 판매를 허용하는 방문판매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비대면 거래가 늘어나면서 고객의 영업점 방문이 줄어들고 있다"며 "아웃바운드 마케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투자자의 요청이 있는 경우에 한해 방문판매법상 청약철회권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생·손해보험협회와 보험대리점협회 등은 최근 공정위를 찾아 23일 시행 예정인 대리점법 규제 대상에 보험회사를 빼달라고 요구했다. 보험회사는 보험대리점(GA)을 통해 보험상품을 판매하는데 GA는 한 보험사에 소속돼 있지 않아 대리점법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공정위는 이미 대리점법이 통과된 만큼 예외를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