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유엔총회에서 국제사회 복귀를 선언했던 이재명 대통령이 1년 만에 한국의 구체적인 역할을 제시했다. 지난해 한반도 평화정책의 큰 틀을 국제사회에 내놓았다면 올해는 북미대화 재개를 위한 '페이스메이커'를 자임하는 한편, 호르무즈 해협발 공급망 위기 대응을 위한 '건설적 기여국 연대'를 제안했다.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한국이 한반도 문제와 글로벌 현안 모두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이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81차 유엔총회에 참석해 17분간 기조연설을 진행했다. 이 대통령은 한국을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이자 페이스메이커"라고 규정한 뒤 "대화의 길을 열고 또 이어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북미대화가 재개되고 이를 한반도 전쟁 종식과 평화체제 전환을 위한 당사자 간 대화로 발전시키는 데 한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반도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면 올해는 이를 실제 외교 공간에서 어떻게 구현할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해 이 대통령은 교류(Exchange)·관계 정상화(Normalization)·비핵화(Denuclearization)를 골자로 한 'END 이니셔티브'를 공개했다. 올해는 이를 바탕으로 포용적·안정적·책임 있는 평화공존이라는 세 가지 청사진을 제시하며 남북 간 소통 채널 복원과 협력을 통한 신뢰 회복, 전쟁 종식과 평화체제 구축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구체화했다.
특히 북핵 문제 해법으로 '단계적 접근법'을 분명히 했다. 이 대통령은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우선 중단시키고, 중기적으로 축소한 뒤 장기적으로 '핵 없는 한반도'로 나아가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완전한 비핵화를 대화의 출발점으로 요구하기보다 추가적인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차단해 상황 악화를 막고, 대화를 복원하면서 최종 목표에 단계적으로 접근하겠다는 현실론에 무게를 실은 것이다.
이 대통령은 특히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으로 변화의 가능성이 어렵게 만들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과 북한의 직접 대화 가능성이 열릴 경우 한국이 이를 지원하고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체제 논의로 연결하겠다는 의미다. 다만 이날 유엔총회에서 북한 측 인사들은 자리를 비워 이 대통령의 연설을 듣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한반도를 넘어 글로벌 현안에서 한국 역할도 제시했다. 호르무즈와 홍해의 해상 봉쇄로 에너지·물류 공급망 불안이 커지는 상황에서 국제에너지기구(IEA) 등 기존 협력체계를 활용해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고, 역량과 의지가 있는 국가들이 먼저 협력하는 '건설적 기여국 연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미국의 호르무즈 관련 협력 요구와 국내 파병 논란을 고려해 군사적 개입보다는 해상 통항과 에너지 공급망 안정이라는 실질적 분야에서 국제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모든 국가가 하나의 해법에 합의하기를 기다리기보다 각국이 강점을 가진 분야에서 유연하게 협력하자는 구상도 공개했다. 이 대통령이 강조해온 실용적·다자주의적 외교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K-이니셔티브'라는 이름으로 글로벌 AI 기본사회, 녹색 대전환,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연대라는 세 가지 비전도 제시했다. 지난해 국제사회 복귀를 선언했던 한국이 올해는 문화와 경제성장을 넘어 AI·기후·에너지 등 글로벌 공동과제 해결에 기여하겠다는 방향으로 외교적 역할의 범위를 넓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