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김호준씨(가명·30)는 아침 8시면 어김없이 신림동 고시원 단칸방을 나선다. 그의 발길은 인근 쉐어어스(share-us)로 향한다. 쉐어어스는 낡은 고시원 건물을 리모델링한 신개념 공유주거공간이다.
김씨는 입주민은 아니지만 회원 자격으로 동네 주민들에게 개방된 카페라운지와 공부방을 이용한다. 이 건물 스터디룸에서 밤 10시까지 공부하고 자신이 머무는 고시원으로 돌아간다. 식사는 1층 라운지에 마련된 부엌에서 해결한다.
이뿐 아니다. 라운지에 비치된 비상약과 공구, 복사기와 팩스를 빌려 쓸 수 있다. 택배 물품을 받아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동네 사랑방이다. 김씨가 라운지 공부방 이용료로 매달 내는 돈은 평균 11만 원. 김씨 같은 동네 회원은 17명, 취준생 등 입주자는 19명이다.
김씨는 “3층 공부방에 있다가 허기지면 라운지로 내려와 밥도 해먹고 머리도 식힌다”며 “여러 사람이 함께 쓴다는 불편함만 감수하면 독서실보다 좋고 외로울 때 서로 의지도 된다”고 말했다.
쉐어어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탓에 입주자들과도 친하다. 고시원 단칸방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친한 친구도 4~5명 생겼다. 그는 쉐어어스의 최고 장점을 ‘교류’로 꼽았다.
“힘들 때마다 여기 친구들이 큰 위로가 됩니다. 시험에 한 번 떨어지고 나면 정말 많이 힘들거든요.”
◇ 고시 폐지 여파로 '고시촌 슬럼화' 지역 문제 돼
고시촌의 새바람을 몰고 온 주역은 사회적기업 건축사무소 ‘선랩(Sunlab)’이다. 선랩의(www.share-us.kr)사회적 미션은 공간재생을 통해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일이다.
선랩의 젊은 건축가들은 청년 주거 빈곤층의 상징인 고시원에 주목했다. (재)한국사회투자가 정리한 서울청년주택 실태자료에 따르면 1인 가구 청년 주거 빈곤율은 36%에 이른다. 1인 가구 청년 4명 중 1명은 주거 빈곤층이란 이야기다.
현승헌 선랩 대표(36)는 “고시원은 열악하지만 이미 1인 가구의 주거형태로 자리를 잡았다”며 “이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사업 의도를 설명했다.
리모델링 전 이곳은 에벤에셀이라는 고시원이었다. 건물 4개층에 층마다 11개씩 모두 44개의 방이 있었다. 당시 입주민은 4명에 불과했다. 최근 고시 폐지에 따른 여파로 호시절은 가고 주변이 점점 비어갔다.
고시생들이 빠져나가자 복사점, 식당 등 인근 점포가 줄줄이 문을 닫아 동네는 슬럼화 위기에 빠졌다. 고시원의 문제는 곧 마을의 문제로 확산됐다. 현 대표는 “슬럼화와 인구 감소로 인한 기반 시설 부족을 해결하는 것이 과제였다”고 설명했다. 1인 가구가 많을수록 공동체 관계가 느슨해 보안에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 공간 재생의 핵심은 ‘관계’ 통한 공동체 복원
쉐어어스는 개인 점유 공간을 최소화해 주거 비용을 절약하고 생활 공유 공간은 넓혔다. 방의 숫자를 44개에서 절반도 안 되는 19개로 줄였다. 개인 방 크기는 이전에 비해 크게 넓어지진 않았지만 공유 부엌과 거실·회의실·발코니·샤워실이 새로 생겼다.
주거 공간은 2·3·6인 실로 구분했다. 현 대표는 “1인 가구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방식이 새로운 주거 형태로 자리 잡기 위해 어떤 유형이 맞을까 실험 중이다”고 말했다. 입주민들은 주로 학생과 취업 준비생들로 19개 방은 모두 찬 상태다.
6인실에 입주한 김체린씨(25)는 지난 3월 목포에서 상경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오기 전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비교해보고 쉐어어스로 숙소를 정했다. 그는 “혼자 있기 싫었는데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고 서로를 챙겨준다”며 “지내보니 값도 저렴하고 시설도 좋아 서울에 곧 올라올 친구에게 이곳을 강력 추천한다”고 말했다.
월세는 35만 원이다. 이는 수도권 기준 대학생 평균 월세 42만 원보다 저렴하다. 보증금은 없다. 공과금은 층별 단위로 계산된다. 공과금을 아끼려면 층 사람들끼리 ‘협력’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한 달에 한 번 반상회 개념으로 입주자 모임도 연다. 현 대표는 “공부에 얽매인 사람들이고 스케줄이 제각각이라 모임엔 절반 정도 모인다”며 “이 점을 감안해 소규모 모임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매주 작은 이벤트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 사회투자기금 연2% 저리 대출이 마중물
고시원이 새로운 형태의 공유 주거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약 3억 원이 들었다. 2014년 서울시 혁신형 사회적기업 공모사업에 선정돼 받은 7500만 원이 종잣돈이 됐다. 모자라는 비용은 연 2% 저리로 한국사회투자로부터 1억5000만 원을 융자받았다.
건물주와는 5년 장기임대 계약을 맺었다. 현 대표는 “주인이 임대료를 신축 기준 50%로 깎아주는 대신 개·보수 비용을 선랩이 부담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선랩이 재임대 형태로 거두는 수입은 한 달에 600~700만 원선이지만 실험모델이라 수익이 나는 구조는 아니다. 선랩은 앞으로 공간 기획과 운영, 리모델링과 재생 관련 컨설팅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 수익 구조를 다변화할 계획이다.
◇리모델링 시 '폐자재 재생' 원가절감 겸 환경보호
선랩의 또 하나의 사회적 미션은 자원 재생이다. 선랩은 철거에 앞서 재생 품목을 챙겨둔 뒤 쉐어어스 1호점에 적용했다. 라운지의 탁자 구조물은 고시원 철거 때 뜯어낸 창틀을 활용했다. 상판은 책상 유리를 재가공했다. 식탁 다리도 폐자재다. 책장은 옷장으로 변신했다. 천장 위 장식도 문짝을 뜯어 활용했다.
폐자재 활용은 운반비도 줄이고 새 자재도 줄여 원가 절감의 효과와 환경적 효과를 동시에 거둘 수 있다. 리모델링을 위해 고시원을 철거하는 데 2달이 걸렸고 폐기물 처리 비용만 500만 원이 소요됐다.
국내 전체 쓰레기 양 중 건축 폐자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현 대표는 “콘크리트같은 경우 분리수거해 재가공하면 재생콘크리트로 활용할 수 있지만, 돈이 되는 금속 물질을 제외하고 인테리어 재료는 거의 다 버려지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먼저 자재를 어디에 쓸지 용도가 정해 보관하면 재사용하기 쉽다"며 "창문틀처럼 규격화되어 재생가치가 큰 구조물들은 공동으로 활용할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집수리 봉사 10년 "꼭 필요한 사람 선택 지원"
선랩의 시작은 '열린사회시민연합'의 집수리봉사단 ‘해뜨는집’이다. 2006년 자원봉사자에서 출발해 관악지역 봉사사업단이 존폐 위기에 놓이자 자원봉사자들과 협업 모델을 꾸리고 2013년 6월 선랩을 창업했다.
현 대표는 2012년 서울시 사회적경제 아이디어대회(위키서울) 공모전에서 상을 받으면서 사회적기업에 눈을 떴다. 그는 풀뿌리조직이 살아나야 한다고 믿는다. 지역 주민들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누구나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뜨는집 집수리봉사는 올해로 10년이 넘었다. 그는 지원 대상을 선정할 때 마을활동가와 사회복지사의 의견을 적극 반영한다. 서류상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현 대표는 몇 해 전 지체장애인 아버지와 딸이 사는 집을 두어 차례 수리해줬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수리가 끝나자 집주인은 아들이 들어와 살 거라며 세입자 부녀를 쫓아냈다. 이 일을 겪은 후부터는 최소 몇 년간 세입자가 바뀌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고 집수리를 해준다. 관악구와 동작구 지역의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매달 1~2가구의 집을 수리해준다.
◇ '사회주택 시범사업' 쉐어어스 2·3 호점 내년 오픈
쉐어어스 1호점의 성공에 힘입어 선랩은 신림동 고시촌에 2호점과 3호점을 준비 하고 있다. 2호점은 이미 공사가 시작됐다. 10년 임대계약으로 내년 초 입주 예정이다.
이 두 곳은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리모델링형 사회주택 시범 사업으로 선정됐다. 시범 사업은 노후한 비주거용 건축물을 리모델링해 만든 공유주거 형태의 주거 공간을 청년 등 1인 가구에 주변시세의 80% 이하로 공급하는 내용이다.
우려도 있다. 현 대표는 “장기 임대 계약이 끝나고 나면 다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며 “이 부분은 건물주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갈 것이다”고 덧붙였다.
현 대표는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같이 있는 사람들과 경험을 나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건축가는 공간을 만들어줄 뿐 그 공간을 채워가는 건 ‘사람’의 몫이라는 얘기다.
그는 고시촌을 '청춘동'이라 불렀다. ‘청년들의 희망이 머무는, 살 만한 동네’로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란다. 선랩이란 이름에는 ‘해뜨는 연구소’란 뜻을 담았다. 해가 뜨는 한 만들어낼 수 있는 것, 희망이다. '청춘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