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 달러에 달하는 대미 전략투자 협상이 텍사스 가스복합화력, 원전 프레임워크, 알래스카 LNG 등 한미 양국의 3대 프로젝트 최종 확정 발표를 시작으로 마침내 실행 궤도에 올랐다. 그러나 통상 당국과 산업계가 직시하는 대미 협상의 진짜 본게임은 따로 있다. 한국 조선업의 대미 진출을 뜻하는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조선협력프로젝트)'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달 22일 서울 정부청사에서 열린 대미투자 관련 브리핑에서 향후 후속 협상의 향방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 판(에너지·원전)이 끝나고 나면 마스가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한다"며 "끝이 없다"는 말로 숨 가쁜 후속 협상을 예고했다.
정부가 연간 200억 달러 송금 한도와 '리스크 풀링(Risk-Pooling)' 등 원리금 회수 안전장치를 묶어두며 에너지 분야 타결을 이끌어낸 만큼 이제 미국 통상 압박의 칼날은 한국 산업의 핵심 축이자 미국의 아킬레스건을 긁어줄 'K-조선'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미국은 중국의 해양 패권 확장에 맞서 자국 조선업 부활과 해군력 강화를 최우선 국가 과제로 내걸었다. 다만 미국 조선업의 현주소는 처참하다. 미국 내 도크(Dock) 부재와 천문학적인 건조 비용, 고숙련 노동력의 단절로 인해 군함 정비(MRO)조차 제때 못 끝내 줄을 서는 실정이다. 세계 최고의 건조 효율성과 엄격한 공기 준수 능력을 갖춘 한국 조선업계가 미국에 사실상 유일무이한 '구원투수'로 거론되는 이유다.
마스가가 성사될 경우 K-조선이 쥐게 될 카드는 파격적이다. 미 해군 함정의 MRO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수준을 넘어 그동안 접근조차 어려웠던 미 군함과 관공선 건조 시장의 빗장까지 풀어낼 기회를 잡게 된다.
문제는 미국이 한국 조선업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나 정작 미국의 케케묵은 법과 제도가 협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장벽은 1920년 제정돼 106년째 이어져 온 '존스법(Jones Act)'이다. 해당 법은 미국 내 항구 간 화물 운송 선박을 반드시 미국 내에서 건조하고 미국인이 소유하며 미국인 선원이 탑승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 낡은 빗장 탓에 한국의 최첨단 거제·울산 도크에서 배를 만들어 미국에 직접 수출하는 길은 법적으로 막혀 있다. 결국 현지 부실 조선소를 인수하거나 합작법인(JV)을 세우는 돌밭길을 강요받게 되며 한국 기업의 초기 투자 비용과 손실 리스크는 극대화된다.
미 국방부의 국제무기거래규정(ITAR)과 족쇄 같은 군사 보안 기준 역시 한국 조선소의 미 군함 MRO 사업 진입을 더디게 만드는 주범이다. 외국 기업에 대한 보안 승인(FOCI 해제)과 함정정비협약(MSRA) 체결 등 까다로운 행정 절차가 한미 협력의 시간을 갉아먹고 있다.
"미국 군함을 고치려면 도면 한 장을 보는 데도 ITAR 승인이 필요하고 미국 법인을 세워도 FOCI 심사로 발이 묶이며 도크 시설이 완벽해도 MSRA 자격을 얻는 데 수년이 걸린다"는 말은 업계의 현실적인 고충을 대변한다.
아울러 노동력 부재와 산별노조의 거센 반발도 걸림돌이다. 한국의 고숙련 기술진이 미국 현지에 신속히 투입될 수 있는 전문직 비자 쿼터 확보가 병행되지 않는다면 현지 도크를 인수해 봤자 '돈만 먹는 하마'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하다.
물론 미 해군력 부실이 심각해지면서 미국 정부 차원에서도 법을 바꾸지 않는 범위 내의 '행정적 우회책'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다. 정치적 부담이 큰 존스법 '법안 개정' 대신 법에 명시된 '국가안보상 유예 '조항을 활용해 함정 MRO, 특수선박에 예외를 적용하는 방안이 미 해군 수뇌부에서 검토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ITAR 무기규제 역시 한국을 방산 핵심 동맹국으로 지정해 보안 승인 절차를 대폭 줄여주는 '패스트트랙 지침'을 내부적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으며 미 의회 내에서도 조선업 인력난 해소를 위한 한국인 전문직 전용 비자(E-4) 신설 법안이 재추진되고 있다.
결국 향후 마스가 협상의 성패는 명문 법률 개정이라는 불가능한 요구 대신 미 행정부가 즉시 발휘할 수 있는 '우회적 실리'를 협상 테이블에서 얼마나 끄집어내느냐에 달렸다.
이외에도 핵연료재처리,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광물 관련 프로젝트도 검토 중이다. 김 장관은 "미국이 제안한 CCUS 프로젝트는 기후변화에 당면한 주요 과제이기도 해 의미가 있지만 상업적 합리성 측면에서 검토하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며 "재처리 프로젝트도 있었는데 상업적 합리성을 갖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나라에 관련 기술이 없다. 국회 동의는 받아야 겠지만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한번 시도를 해볼 수는 있겠다 정도로 고민 중"이라고 밝혔다. 100억불 이상의 대규모 투자는 아니더라도 상업적 합리성보다 전략적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공급망 분야에 대한 프로젝트도 계속 고민한다는 방침이다.
김 장관은 브리핑 말미에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언급하며 "(이번 대미투자 프로젝트 추진 결과 등) 이 정도는 큰 별은 아니지만 통상문제 등 불확실한 상황을 기업들이 헤쳐나가는데 희미하게라도 비춰줄 수 있는 별이 되고,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