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팹(공장) 가동을 앞두고 도로·용수·전력 등 필수 기반 시설 확충이 늦어지면서 적기 가동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산업계의 우려가 제기됐다. 배터리와 디스플레이 업계는 세제 혜택 개편을, 바이오와 로봇 업계는 규제 완화와 AI(인공지능) 실증 인프라 개방을 정부에 건의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국가첨단전략산업 분야 기업 의견을 수렴한 '국가첨단전략산업 정책 건의 과제' 41건을 규제합리화위원회 등에 건의했다고 21일 밝혔다. 업종별로는 반도체가 21건으로 가장 많았고 바이오 9건, 배터리 4건, 로봇 3건 등이 뒤를 이었다. 전체 건의 과제 41건 중 20건은 별도의 법률 제·개정 없이 관계 기관이 검토·추진할 수 있고, 나머지 21건은 국회 입법이 필요하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도로·용수·전력 등 필수 기반 시설 확충이 시급하다는 요청이 나왔다. 경기 용인 반도체클러스터는 내년 2월 첫 번째 팹 클린룸 가동을 앞두고 생산 자재 운반 차량과 두 번째 팹 공사 차량이 겹쳐 주변 교통량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주 진입도로인 국가지원지방도(국지도) 57호선(원삼~마평) 개량 공사는 국토교통부 고시가 오는 10월 이후로 예정된 상황이다. 재계는 해당 사업이 지난 8월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한 만큼 '제6차 국도·국지도 건설계획' 고시 일정을 앞당겨야 한다고 요청했다.
공업용수를 적기에 공급하기 위한 인허가 기간 단축과 재정 지원 확대도 주문했다. 일 3.5만톤(t) 규모의 충북 청주 하수처리수 재이용시설은 타당성 조사를 포함해 사업 착수부터 착공까지 총 42개월이 걸렸다. 총사업비 622억원 중 국비와 지방비를 합친 공공부담은 50%에 그쳤다. 한경협은 첨단산업 기반 시설 특례를 신설해 착공까지 기간을 18개월 이내로 줄이고 반도체특별법 시행령의 국비 지원 대상에 '하수 재이용 시설'을 명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무탄소전력 인증·조달 여건 개선도 핵심 현안으로 꼽혔다. 현재 원자력 등 무탄소전력을 사용하는 기업은 사용량과 발전원을 인증할 국내 공통 체계가 없어 구글·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의 전력 구매 증빙 요구에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다. 현행 '전기사업법'은 기업이 발전사업자와 직접 계약해 전력을 구입할 수 있는 대상을 재생에너지로 한정하고 있다.
한경협은 '탄소중립기본법'을 개정해 무탄소전력 인증체계를 마련하고 '전기사업법'을 개정해 원전 등 무탄소전력의 직접 구매를 단계적으로 허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대수력 발전도 기업이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건의했다.
배터리와 디스플레이 업계에서는 대규모 시설 투자 부담을 낮추기 위해 초기 적자 국면에서도 세제 혜택을 투자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현행 국가전략기술 투자세액공제는 납부할 법인세에서 공제액을 차감하는 방식이어서 과세소득이 없는 기업은 당장 혜택을 활용하기 어렵다. 미국 등 해외 사례처럼 미공제 세액을 현금으로 조기 환급하는 제도가 대안으로 꼽힌다. 배터리 업계의 전문연구요원 병역특례 확대와 ESS(에너지저장장치) 평가시설 구축도 요청했다.
바이오와 로봇 업계에서는 시장 진입 규제 개선과 AI 실증 인프라 개방을 요청했다. 바이오 업계는 세포치료제와 mRNA(메신저 리보핵산) 백신 등 소규모 시험 생산을 위탁받는 업체의 제조·품질관리기준(GMP) 적합성 평가 요건을 현행 3개 제조단위 생산실적에서 1개로 완화할 것을 건의했다. 혁신 합성신약과 핵심 원료의약품의 국가전략기술 지정을 확대하고 '국내생산세액공제'에 백신·바이오의약품을 포함해 줄 것도 요청했다.
로봇 업계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환경 인식과 학습에 필요한 원본 영상·음성 데이터를 안전한 실증구역에서 승인 후 활용할 수 있도록 개인정보 규제를 완화해 달라고 건의했다. 아울러 △공기열 히트펌프 국내생산세액공제 추가 △국산 AI 기반모델 탑재 가전의 보급·공공수요 지원 등도 건의했다.
권혁민 한경협 성장전략실장은 "국가첨단전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업의 투자 판단과 실행을 가로막는 제도적 걸림돌을 신속히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부와 국회가 현장에서 바로 체감할 수 있는 과제부터 속도감 있게 개선해 기업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