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무기' 탄저균 반입 기준조차…'시행령 백지위임'

이상배 기자
2015.06.02 15:20

[the300] 법률에 구체적 한정 없이 시행령에 '포괄위임'...'위헌' 사례 수두룩

박근혜 대통령/ 사진=뉴스1

최근 주한미군 오산기지로 '살아있는 탄저균 샘플'이 배송되고,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확산으로 사망자까지 발생하면서 '고위험병원체'의 국내 반입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고위험병원체'의 반입 허가 대상자의 요건이 법률이 아니라 하위법령인 시행령에 규정돼 있어 헌법상 '포괄위임 금지원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부의 시행령에 국회가 '수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국회법 개정안을 놓고 정부와 국회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국회가 그동안 법률로 정해야 할 사항까지 시행령에 사실상 '백지위임'함으로써 스스로 책임을 방기하고 권한을 축소시켰다는 비판도 나온다.

2일 국회와 법제처에 따르면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법제연구원은 올초 발간한 '법령의 헌법 합치성 제고를 위한 정비방안' 제하의 보고서에서 22건의 법령이 '포괄위임 금지원칙'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포괄위임 금지원칙'이란 법률이 위임할 사항과 범위를 구체적으로 한정하지 않고 시행령 등 하위법령에 포괄적으로 위임해서는 안 된다는 헌법상 원칙이다.

헌법 제75조는 "대통령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해 위임받은 사항과 법률을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에 관해 대통령령(시행령)을 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제연구원은 이에 대해 "법률에 하위법령으로 규정할 내용·범위의 기본적인 사항들을 가능하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규정해 누구라도 그 법률로부터 하위법령에 규정될 내용의 대강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주한미군 오산기지로 배송된 '살아있는 탄저균 샘플'과 같은 '고위험병원체'의 국내 반입에 대해서도 현행 법률은 반입 허가 대상자의 요건을 직접 규정하지 않고 있다.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22조에는 "감염병의 진단 및 학술 연구 등을 목적으로 고위험병원체를 국내로 반입하려는 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춰 보건복지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만 돼 있다.

하위법령인 시행령에 가서야 △안전관리 등급별로 허가를 받거나 신고를 한 연구시설을 설치·운영할 것 △고위험병원체의 안전한 수송 및 비상조치 계획을 수립할 것 △고위험병원체 전담관리자를 둘 것 등의 요건이 규정돼 있다.

전염성이 높고 치사율이 80% 이상에 달하는 탄저균과 같은 고위험병원체의 반입처럼 대중의 생명과 직결되는 중대한 사안을 법률이 아닌 시행령으로 정한 것은 명백한 '포괄위임 금지원칙' 위반이라고 법제연구원은 지적했다.

다단계 판매원의 등록 결격 사유에 대한 규정도 '포괄위임 금지원칙'에 위배되는 사례다. 현행 '방문판매 등에 관한 법률' 제15조 2항 5호는 다단계 판매원으로 등록할 수 없는 경우의 하나로 "이 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한 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자"라며 구체적인 사항을 시행령에 위임하고 있다. 이는 직업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행령이 아닌 법률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 법제연구원의 판단이다.

이처럼 중요한 사항들을 법률에 규정하는 대신 시행령 등에 위임한 법률 조항들은 상당수가 정부안으로 마련된 경우들이다. 그러나 소관 상임위원회 또는 법제사법위원회 등의 심사 과정에서 시행령 등으로의 과도한 위임 문제를 바로잡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회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한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실 관계자는 "의원들은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한 법률 조항까지 만들 정도로는 전문성이 높지 않거나 현장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태생적으로 표를 신경 쓸 수 밖에 없고 적을 만드는 걸 원하지 않는 국회로선 특히 이해관계가 첨예한 사안에 대해 법률 대신 시행령에 위임해 정부에 떠넘기는 걸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회가 구체적인 사항들을 시행령에 위임하는 대신 법률에 규정할 수 있을 정도의 정책적 역량을 확보하려면 의원 보좌진이나 국회예산정책처, 국회입법조사처 등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적 지원이 더욱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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