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땐 "경기침체" 야당땐 "경기회복", 고무줄같은 '추경요건'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국회에서 추가경정예산(추경)만을 위해 시정연설을 한 지난 12일.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을 향해 “청년실업이 국가적 재난 수준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회에서 조속히 처리해달라는 호소도 했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은 시큰둥했다. 법에서 정한 추경 요건을 벗어난다는 이유에서다. 여당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 모두 5번의 추경이 있었다”며 “자유한국당이 여당이었던 지난 10년을 복기해보라”고 다그쳤다.
문재인 정부의 첫 추경에 대한 야당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내용에 앞서 ‘편성 요건’부터 문제삼는다. 추경은 정부가 예산을 짠 이후 발생한 여러 사유로, 추가 예산을 편성하는 것을 말한다. 헌법 제56조는 추경에 대해 ‘이미 성립한 예산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편성한다’고 적시했다. 추경은 본예산에 대비되는 말인데, 국가재정법(제89조)에서 지정한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법에 따르면 △전쟁이나 대규모 재해가 발생한 경우 △경기침체와 대량실업 또는 남북관계의 변화나 경제협력과 같은 대내·외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법령에 따라 국가가 지급해야 하는 지출이 발생하거나 증가하는 경우 등 세가지를 제시했다. 이중 하나만 충족하면 된다.
문제는 법 해석이다. 여야가 항상 다른 관점에서 본다. 이를테면 ‘경기 침체’와 ‘대량 실업’이다. 구체적 기준이 없다보니 아전인수식 해석만 존재한다. 경제성장률 등 수치가 갖는 애매함이 크다. 기획재정부 등 정부는 통상 2%대 성장률을 저성장이라고 규정하는데 야당은 "플러스 성장이 왜 경기침체냐"는 식의 반발을 한다. 실업도 마찬가지다. 실업률 몇 %를 대량 실업으로 할 지, 청년 실업만으로도 가능한지 등 해석이 다양하다.
시계를 2008년으로 돌려보자.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 4조6000억원의 추경을 편성했다. 국제유가 급등이 배경이었다. 유가 급등으로 경제여건 악화됐고, 지속적인 물가상승에 실질 국민소득이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요건이었다. 2009년엔 28조4000억원 ‘슈퍼 추경’을 했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 침체 등 대외여건 악화로 경기위축이 이유였다.
박근혜 정부도 출범 직후 경기침체를 이유로 17조3000억원 규모의 대규모 추경을 했다. 지속적인 저성장으로 경기 침체가 되고 세수결손 재정집행 여력이 떨어진 게 추경 요건으로 제시됐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여파로 2015년엔 11조6000억원의 추경이 있었다. 국가적 재난 상황이었던 탓이다. 역시 악화된 경제여건으로 세수결손과 재정집행 여력 감소가 이유였다.
2016년엔 저성장 기조 지속으로 청년층을 중심으로 고용 사정이 안 좋았다. 11조원의 추경을 했는데 브렉시트와 기업 구조조정이 이유였다. 기업 구조조정 영향으로 실업자 증가가 예상됐다.
당시 야당(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추경안이 나올 때마다 기준이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2008년 고유가가 요건일 땐 국가재정법에 위배된다고 반대했다. 2015년엔 메르스를 국가적 재난으로 봐야하는지 의문을 던졌다. 노무현 정부때도 여야가 뒤바뀌었을 뿐 상황은 비슷했다.
2004년 내수부진을 이유로 2조5000억원 규모의 추경이 편성됐다. 당시 가계와 기업의 체감경기 위축세 지속과 재정 조기 집행으로 재정집행 여력 감소가 추경 사유였다. 이듬해 4조9000억원 규모의 추경을 했을 땐 경기침체가 이유였다. 2006년 2조2000억원 추경안은 태풍 에위니아 등 집중호우가 이유였다. 이때도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은 추경 요건이 안 된다며 사사건건 여당과 부딪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모든 추경은 국회를 통과했다. 야당이 겉으로는 반발하면서도 ‘돈다발’을 거부할 용기는 없기 때문이다. 지역에 나가는 돈이 쏠쏠하다.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겉으로 추경 반대론이 나올뿐, 결국엔 국회를 통과했다. 2004년부터 추경때마다 보고서를 내고 있는 국회 예산정책처(예정처)는 이런 고무줄 같은 추경 요건 적용 논리를 비판한다. 예정처 관계자는 “어느 수준의 경제성장률 하락을 ‘경기침체’로 볼 것인지, 또 특정 지역과 업종의 실업 증가를 ‘대량실업’으로 해석할지 기준이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의 이번 추경도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이번 추경은 예상됐었다. 문 대통령이 대선때 과감한 추경으로 일자리 문제 해결 의지를 보였기 때문. 문 대통령은 2013년 이후 급격한 청년 실업률 악화와 저소득층 소득 감소, 소득분배 악화, 체감경기 악화를 요건으로 내세웠다.
여당 안팎에선 이번 추경도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본다. 민주당 관계자는 “야당의 반대로 일자리 추경이 무산되면 여당보다 야당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며 “추경안 부결의 책임을 야당이 뒤집어쓰기 때문에 결국 찬성으로 돌아설 것”이라고 말했다.
예정처는 문재인 정부 첫 추경에 대해서도 곧 보고서를 낸다. 47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이다. 역대 추경 보고서가 200페이지 안팎이었음을 감안하면 2배가 넘는다.
예정처는 이번 추경 보고서에 들어가는 요건에 “최근 일자리 확충, 민생안정 등을 이유로 추경이 반복적으로 편성되고 있다”며 “본예산을 보다 면밀히 편성하면서 가급적 추경을 지양하고, 국가재정법이 추경편성요건을 엄격히 제한한 취지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알려졌다.
예정처 관계자는 “추경은 이미 확정된 예산에 변경을 가할 필요가 있는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편성돼야 한다”며 “국회 심사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업난, 추경 요건 부합" vs "국가재정법, 추경 제한 위해 존재"
청와대와 여당이 내세우는 일자리 추경의 법적 근거는 '국가재정법 89조'다. 이 조항에선 추경을 할 수 있는 요건으로 자연재난과 사회재난 또는 경기침체·대량실업·남북관계의 변화 등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5월 기준 9.3%로 나타난 청년실업률 등 고용지표가 '대량실업'에 부합한다는 판단이다. 반면 야당은 최근 고용지표가 호전되고 있는 상황 등을 근거로 들며 법적 요건이 부족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머니투데이 더(the)300은 15일 경제·재정 전문가들에게 일자리 추경 요건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이들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2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지적한 대로 실업난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점에는 다들 공감했지만 현재의 실업난이 추경이 필요한 수준인지 등 추경 요건의 적합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빚' 아닌 남는 세수 사용…고용 증가 모멘텀에 적합"=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추경이 요건에 충분히 부합한다는 전문가들은 고용시장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남는 세금을 적절히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강인수 현대경제연구원장은 "전반적으로 '대량실업'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면서도 "청년 실업은 심각한 상황이고 5년째 장기 저성장이 고착화돼가고 있다"며 일자리 추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강 원장은 "수출과 건설 투자 호조로 경제 성장률이 나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소비가 늘지 않아 진짜 경기회복으로 보기 어렵다"며 "일자리 창출로 경기 침체 탈출을 위한 모멘텀을 살려 나가려면 추경을 막을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백웅기 KDI 수석이코노미스트(상명대 교수)는 "이미 걷어 어차피 써야 할 세금을 어디다 쓰느냐의 문제"라며 일자리 추경을 옹호했다. 백 이코노미스트는 "지금까지 추경 반대 근거 논리가 '재정건전성 악화'인데 일자리 추경 재원 자체가 빚을 만드는 국채 발행이 아니라 추경을 반대할 만한 근거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박근혜정부 등 이전 정부에서도 추경 논란이 지속돼왔는데 결국 여야 공감대가 형성돼 국회를 통과했다"며 "추경 심사가 고도의 정치행위인 만큼 국회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고 했다.
◇"재정 사이클 고려, 신중해야…"=반면 박형수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은 "재정 상황이 좋을 때 세수를 저축해야 재정 위기일 때 추경을 해야 하는 것"이라며 "재정학자 입장에서 재정 사이클 악화를 생각하면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박 원장은 또 추경 요건 근거법인 국가재정법에 대해 "역대 정부에서 추경이 기준 없이 잦았던 이유로 추경을 남발하지 말자고 참여정부 때 기준을 세우기 위해 (추경 요건을) 만들었는데 최근에도 추경이 너무 잦다"며 "이번 추경안도 세부 내용을 보면 일자리 외에도 사업 내용 초점이 번져있어 실업난 해결을 위한 추경이라는 요건에 약간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출신인 최중경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도 "당장 일자리를 만든다는 취지는 좋아도 공무원 일자리를 만든다는 점에서 내년 잉여분이 올해보다 적다면 결국 재정건전성 악화는 불가피하다"며 "여당은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