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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로 겨루면 승산이 없습니다. 하지만 작기 때문에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습니다."
4대 과학기술원 가운데 DGIST의 학부 입학 정원은 연 200명으로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의 4분의 1에도 못 미친다. 혁신창업원 직원도 20명이 채 안 되고 창업 지원 경험을 갖춘 전문인력도 아직 많지 않다.
지난 6월 취임한 권오상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혁신창업원장은 최근 머니투데이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유니콘팩토리'와 만나 "우리가 선택한 몇 개 영역에서는 KAIST 못지않은, 나아가 능가하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며 "DGIST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딥테크 창업 명문대학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벤처캐피털(VC)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창업자이자 공동대표였던 권 원장의 대학행은 업계에서도 화제였다. 그는 △기아자동차 주임연구원 △삼성SDS 수석보 △영국 바클레이스캐피털 런던·싱가포르지점 매니저 △금융감독원 연금금융실장·복합금융감독국장 △차의과학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 등 산업·금융·학계·감독기관을 두루 거쳤다. 그런 그가 연고도 없는 지역 대학에서 이제 막 기반을 다지는 창업조직의 수장을 맡자 '왜?'라는 물음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권 원장은 "VC 투자도 굉장히 보람 있지만 조금 더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다"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단계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기업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출발점에서부터 창업생태계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권 원장이 부임 후 주목한 DGIST의 강점은 학생들의 유연함이다. DGIST는 2학년까지 무학과로 전공을 탐색하고, 이후에도 학과가 아닌 '트랙'을 선택한다. 학생이 여러 과목을 조합해 자신만의 트랙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그는 "DGIST 학생들은 관심 있는 문제를 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거꾸로 찾아 연결하면서 기존 학과 개념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경계를 허문다"며 "창업 관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질"이라고 평가했다.
권 원장이 가장 먼저 추진하는 사업은 '신입생 전원을 대상으로 한 창업교육'이다. 아직 교과 도입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구상은 구체적이다. 신입생 200명 전원이 한 학기 동안 매주 1시간씩 듣는 1학점 세미나로, 과목명은 '창업과 탐험'이다.
사업계획서를 쓰거나 회사를 만드는 수업은 아니다. 권 원장은 "비유하자면 가보지 않은 바다에서 예상치 못한 소나기를 만나면서 스스로 지도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밟게 될 것"이라며 "창업이 생각만큼 겁낼 일은 아니구나, 누가 한다고 하면 나도 한번 몸을 실어볼까 정도가 되도록 1학년 때 미리 예방접종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년에는 학부생 20명 안팎을 선발해 1년간 밀착 지원하는 가칭 '20Q' 프로젝트도 구상하고 있다. 학생 각자가 품은 질문을 따라 탐험하고 문제의 근원까지 파고들어 자기만의 결과물을 만드는 방식이다. 회사 설립을 의무화하지도 않는다.
학교 안에 머물지 않고 지역으로 창업생태계를 넓히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지난달 개최한 '2026 DGIST 창업주간'은 그 첫 시도였다. 벤처투자자와 창업가 7명이 특강을 했고 슬로건 공모전에는 250건이 접수됐다. 지역 대학·출연연에도 행사를 적극 알렸다. 권 원장은 "혁신창업원의 미션 범위는 DGIST 내부가 아니라 대구·경북지역"이라며 "DGIST에는 아직 유니콘도, 상장사도 없지만 지역 창업가들과 함께 이런 꿈을 실현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학교에 창업 인프라를 세우는 작업도 본격화한다. 다양한 형태의 로봇을 시험할 수 있는 테스트 인프라를 구축, '피지컬 AI'를 새로운 승부처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권 원장은 "둘러보니 교원 창업기업과 연구소 쪽에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좋은 로봇 스타트업이 생각보다 많다"며 "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로봇을 시험할 수 있는 테스트 인프라 구축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권 원장은 창업 건수나 투자유치 금액을 핵심 KPI로 삼는 기존 방식을 경계했다. 대신 투자·글로벌·문화를 중심으로 창업생태계를 얼마나 풍성하게 만들었는지를 보겠다는 구상이다. 그는 "예를 들면 창업기업의 30% 이상에서 글로벌 성과를 내고, 학부생 창업 참여율을 30%까지 끌어올리는 등의 목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 원장이 비전을 이뤄내기 위해 꼽은 롤모델은 이스라엘 테크니온과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ETH 취리히)다. 두 학교 모두 수도 밖에 있고 규모도 크지 않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를 창업으로 잇는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테크니온은 미국 투자정보업체 피치북의 집계에서 학부 졸업생 창업 실적 세계 10위에 올라 있다. 졸업생이 세운 기업 1000곳이 넘는다. ETH 취리히는 지난해에만 연구성과 기반 스핀오프 24곳을 포함해 46개 기업을 새로 배출했다. 이들 기업이 작년 한 해 동안 유치한 투자금은 5억4000만스위스프랑(약 9400억원)에 달한다.
그는 "창업을 가장 잘하는 학교는 MIT와 스탠퍼드지만, 규모와 지역의 한계를 생각하면 직접 목표로 삼기는 어렵다"며 "규모의 열세를 인정하되 DGIST 학생들의 유연성, 지역 생태계 확장, 피지컬 AI 등을 무기로 승부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