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5일. 미국 4위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했다. 6390억 달러의 자산과 부채 6190억 달러를 떠안은 역대 최대 규모의 파산이었다. 미국 뉴욕증시 다우지수가 하루 만에 500포인트 넘게 추락할 정도로 충격이 컸다. 2001년 9·11테러 이후 가장 큰 폭락이었다.
이 거대한 위기는 1년 전 유럽에서 이미 예고됐다. 전문가들은 프랑스 투자은행 BNP파리바가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채권에 투자한 펀드 3개의 환매를 중단한 2007년 8월 9일을 금융위기의 시작점으로 본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미국 부동산시장이 영원히 오를 거란 믿음 속에 신용등급이 낮은 이들에게 마구잡이로 모기지를 내준 데서 비롯됐다. 월가 금융기관들은 당시 이들의 부실채권을 모아 만든 복잡한 파생상품을 거래했다. 위험은 복잡한 구조 속에 숨겨졌다. 그러나 결국 부동산 부실 대출은 신용 붕괴로 이어지며 전체 금융 시스템 위기로 번졌다.
최근 월가는 19년 만에 다시 폭풍전야와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금융시장 위기는 매번 다르지만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블루아울과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 등은 빗발치는 환매 요청을 견디지 못하고 자사 사모신용 펀드에서 잇달아 자금 인출 제한했다. 2007년 BNP파리바의 펀드 환매 중단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현재 사모신용 펀드가 인출을 제한하는 이유도 2007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산 가치가 떨어졌을 때 급하게 자산을 팔면 헐값에 넘겨야 하는 데다 다른 자산의 투매를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애초에 자산이 장기 대출 형태로 묶여 있어 쉽게 팔리지도 않는 구조다. 특히 사모신용 자산은 비상장 기업 중심이기 때문에 투명한 가치 평가가 어렵다. 시장 심리가 악화할 때 정확한 가치 평가가 어려우면 시장은 더 비관적으로 판단하기 마련이다.
국제유가가 상승하고 있단 외부 환경도 2008년 금융위기 이전을 상기시킨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국제유가는 배럴당 70달러 수준에서 140달러까지 두 배 급등하며 인플레이션 압력을 키웠다. 최근 국제유가 기준물인 브렌트유 역시 이란 전쟁 여파로 급등세다. 연초 이후 상승률은 65%에 이른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유가가 더 오를 수 있다. 이는 시중금리 상승으로 이어지며 안 그래도 불안한 사모신용 시장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 수 있다.
다만 모든 전문가가 금융위기 가능성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사모신용 시장이 전체 금융시스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전만큼 크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로이터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의 뿌리가 된 주택저당증권(MBS) 시장은 2007년 약 7조2000억달러로 당시 전 세계 증권의 약 5%를 차지했다. 반면 현재 사모신용 시장 규모는 약 2조달러로 전체의 1%에도 미치지 않는다.
또 대부분의 사모신용 펀드는 분기별 환매를 순자산의 5%로 제한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이 규정은 사모신용 펀드들이 환매 요구에 응하기 위해 대출 채권을 대량으로 헐값 매각해 연쇄 도산에 빠지는 상황을 일정 정도 막아준다.
그러나 2007년 서브프라임 사태와 마찬가지로 사모신용 역시 전통적인 은행 대출에 비해 규제가 느슨하다. 때문에 시장의 실제 파급력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부도율도 상승하고 있다. 피치는 최근 보고서에서 지난해 사모대출 부도율이 9.2%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주목할 점은 여기에 소프트웨어 기업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 기업은 안정적 구독료 사업 모델을 내세워 사모대출 시장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투자처로 꼽혔다. 그러나 올해 인공지능(AI) 발전에 따른 사업 붕괴 우려가 커지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로이터는 사모신용이 제기하는 위험은 전반적으로 하방으로 치우쳐 있다고 경고했다. 사모신용 시장의 붕괴가 표면화되진 않았지만 이상징후는 뚜렷하단 지적이다.
미국 사모신용(대출) 부실 공포가 글로벌 금융시장의 '약한 고리'로 떠오르자 정부도 관련 움직임을 예의 주시 중이다. 익스포저(위험노출액) 등을 고려할 때 현재로선 사모신용 시장 불안이 '제2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와 같은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다만 과거 위기의 학습효과를 바탕으로 리스크 선제 차단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18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재정경제부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등 관계부처는 최근 미국 사모신용 시장의 부실 징후를 공유하고 국내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 등을 집중 점검 중이다.
특히 구윤철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이 관련 현황을 수시로 보고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재경부 내에선 국제금융국과 자금시장정책과를 중심으로 실시간 영향을 파악 중이며 관계기관 간 핫라인을 통해 대응체계를 한층 강화했다.
이와 관련, 구 부총리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 회의 결과에 따른 시장 영향을 점검하기 위해 19일 열릴 확대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이창용 한은 총재, 이억원 금융위원장, 이찬진 금감원장 등과 사모신용 리스크 관련 현황을 점검하고 대응 방안을 논의한다.
정부는 일단 이번 사태가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제2의 서브프라임 사태가 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판단한다. 익스포저 등을 고려할 때 국내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도 제한적이란 분석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대부분 기관이 이번 미국 사모신용 부실 논란이 과거 서브프라임 사태처럼 번질 상황은 아니라고 분석하고 있다"며 "금융위, 금감원, 한은과 함께 관련 상황을 잘 살피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일각에선 위험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현재 2조~3조달러 수준까지 팽창한 사모신용 시장이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1조3000억원~2조달러) 규모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돼서다. 특히 사모신용 시장 위험이 장기화하고 있는 '이란 전쟁'에 따른 국제유가 급등 등 복합 위기 상황과 맞물려 금융시장 전반에 충격을 가중시킬 수 있단 우려가 크다.
아울러 최근 제기되고 있는 'AI(인공지능) 거품론'과 연계해 위기가 증폭될 수 있단 경계의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 최근 사모신용 펀드 전반에 환매 압력이 거세진 배경에는 AI 열풍에 올라타 사모대출을 대거 끌어다 쓴 소프트웨어·테크 기업들의 부실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AI 과잉 투자에 따른 'AI 거품론'이 현실화할 경우 관련 기업들이 받아 간 사모대출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할 '뇌관'이 될 수 있단 지적이다.
한은은 최근 발표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AI산업의 구조적 성장 기대가 유효하더라도 수익성 검증 과정에서 시장의 평가가 급변할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지적했다. 기술 변화와 경쟁 구도의 급격한 전환이 시장 기대를 단기간에 조정시키며 금융시장 전반의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단 경고다.
재경부 관계자는 "과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예기치 못한 경로로 위기가 파급됐던 만큼 리스크를 미리 짚어보고 사전 차단하자는 취지에서 관련부처가 함께 세밀하게 살펴보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