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전 총재가 고소득·고숙련 화이트칼라 근로자에게 주 52시간 상한과 초과근로수당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 '한국형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 Collar Exemption)' 도입을 제안했다. 일률적인 근로시간 규제가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는 데다 저소득 근로자의 소득 감소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7일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이 전 총재와 오삼일 한은 조사국 고용연구팀장, 윤진영 과장, 한진수 조사역은 전날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인구클러스터 포럼에서 이 같은 내용의 '근로시간 제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연구개발(R&D)·정보기술(IT)·금융 등 업무 자율성이 높고 성과 측정이 가능한 고숙련 직무에 대해 근로시간 규제를 달리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잠재적 적용 대상은 관리직·전문직·사무직 가운데 연간 총급여가 상용근로자 중위임금의 200% 수준인 약 8200만원 이상인 근로자다. 약 149만명으로 전체 상용근로자의 10.8%에 해당한다. 다만 교대근무 등으로 근로자가 업무시간을 스스로 정하기 어려운 직무는 제외해야 한다고 봤다.
이들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상 주 40시간과 연장근로를 포함한 주 52시간 한도, 연장·야간·휴일근로 가산수당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 방안을 제시했다. 대신 기존 확정급여를 보전하고 성과에 따른 추가 보상체계를 마련하는 한편 최소 연속 휴식시간과 휴가 사용 의무 등 건강 보호 장치를 병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전 총재는 현행 근로시간 제도가 제조업 중심의 과거 노동시장에 맞춰져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잘살기 위해서는 화이트칼라가 열심히 일해야 할 때"라며 "1억5000만원씩 받는 사람은 정말 열심히 일하고 그게 나라를 이끌어가도록 하는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화이트칼라가 열심히 뛰게 하고 본인들이 본인의 건강을 지킬 수 있게 유연성을 줘야 한다"며 "화이트칼라를 블루칼라와 같은 방식으로 관리해서는 나라의 발전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연구진은 주 52시간 상한제 도입 이후 초과근로 시간과 초과급여가 각각 7.7%, 6.7% 감소한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근로시간 감소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연구진 분석에서 52시간제 도입 이후 1인당 생산성 추세 기울기는 0.44에서 0.30으로 낮아졌다. 사업체 자료에서도 1인당 생산성에 통계적으로 유의한 영향이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성과급 비중이 높은 기업일수록 생산성에 미친 영향이 부정적이었다. 성과급 비중이 1%포인트 높은 기업은 4년 누적 기준 1인당 부가가치 증가폭이 2.5%포인트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과와 업무시간의 연관성이 낮은 직무에 획일적인 근로시간 규제를 적용할 경우 생산성을 제약할 수 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소득 감소는 저소득 근로자에게 집중됐다. 소득 하위 20% 근로자의 초과근로 시간과 초과급여는 각각 15.5%, 15.9% 감소했고 총급여는 1.3% 줄었다. 반면 고소득층에서는 총급여 감소가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법정근로시간 자체를 주 4.5일 수준으로 추가 단축하는 방안에도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구진은 "52시간제에서 확인됐듯 근로시간 단축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확인되지 않았고 교섭력이 약한 저소득 근로자에게 소득 감소 충격이 집중됐다"며 "주요국 가운데 프랑스를 제외하면 법정근로시간이 주 40시간을 밑도는 국가는 없다"고 했다.
대신 휴가 사용 확대 등을 통해 실제 근로시간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국내 근로자의 유급휴가 소진율을 현재 75%에서 95%로 높일 경우 연간 근로시간을 약 31시간, 하루 8시간 기준 약 4일 줄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연구진은 "고령화와 인공지능(AI) 확산으로 노동력 규모와 업무 방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며 "일할 때는 성과와 자율성을 높이고 쉴 때는 제대로 쉴 수 있도록 근로시간 제도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