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반도체를 넘어 데이터센터와 전력, 냉각, 배터리, 건설까지 아우르는 글로벌 AI(인공지능) 인프라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낸다. 삼성전자 등 주요 관계사는 미국 AI 인프라 기업 '헬릭스 디지털 인프라스트럭처(이하 헬릭스)'에 공동 투자하면서 그룹이 보유한 AI 인프라 역량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2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삼성의 이번 헬릭스 투자 규모는 총 10억달러(약 1조3600억원)로 삼성전자가 5억달러를 투자하고, 나머지 관계사 5곳이 5억달러를 분담하는 구조다. 헬릭스는 글로벌 사모펀드 운용사 KKR이 엔비디아, 미국 전력회사 비스트라(Vistra), 쿠웨이트투자청(KIA) 등과 함께 설립한 AI 인프라 전문기업이다. 출범 당시 창립 투자자들이 약정한 장기 자본만 100억달러에 달했다. 여기에 삼성의 10억달러가 추가된다.
이번 투자가 주목받는 것은 단순한 AI 인프라 기업 지분투자에 그치지 않아서다. 헬릭스가 추진하는 사업 대부분이 삼성 관계사들이 이미 경쟁력을 갖추고 있거나 미래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는 분야와 맞닿아 있다.
헬릭스의 가장 큰 특징은 데이터센터 건설에만 투자하는 기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데이터센터 개발·운영부터 발전, 송배전, 광통신망과 네트워크까지 AI 인프라 전반에 직접 투자하고 이를 통합 제공하는 'AI 인프라 원스톱 사업자'를 지향한다. 엔비디아가 AI 기술과 인프라 분야를 담당하고, 비스트라는 전력 확보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AI 데이터센터가 대형화하면서 데이터센터 건물과 서버만 확보해서는 인프라를 구축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대규모 GPU(그래픽처지장치)를 가동하기 위한 전력과 송배전망, 서버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열을 처리할 냉각설비, 데이터를 빠르게 전송할 통신망까지 함께 확보한다. AI 데이터센터의 확산이 반도체·전력·냉각·건설·통신·금융을 아우르는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삼성이 헬릭스의 주요 투자자로 합류하면서 그룹이 보유한 다양한 사업 역량을 글로벌 AI 인프라 프로젝트에 연결할 수 있는 창구도 마련됐다. 삼성은 국내 기업집단 가운데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밸류체인을 가장 폭넓게 보유한 곳 중 하나다. 구체적으로 △삼성전자의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냉각 △삼성물산의 데이터센터·발전시설 건설 △삼성SDS의 데이터센터 운영과 GPU 클라우드 서비스 (GPUaaS) △삼성SDI의 UPS(무정전전원장치)와 BBU(배터리 백업 유닛) 등에 활용되는 배터리 기술까지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다양한 사업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헬릭스 역시 삼성의 이런 종합적인 역량에 주목했다. 아담 셀립스키 헬릭스 CEO(최고경영자)는 "세계적인 선도 기술기업인 삼성은 헬릭스와 고객들에게 도움이 될 독보적인 역량을 갖추고 있다"며 "전 세계 하이퍼스케일러(대규모 클라우드 운영기업)를 위한 차세대 디지털 인프라 구축을 가속화하기 위해 삼성과 협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삼성 입장에서도 각각의 관계사가 개별적으로 글로벌 하이퍼스케일러를 공략하는 것보다 데이터센터 프로젝트 초기 단계부터 그룹의 제품과 솔루션을 함께 제안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그동안 HBM(고대역폭메모리)과 서버용 D램, SSD(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 등 반도체를 중심으로 부각됐던 AI 사업의 수혜 범위도 냉각과 건설, IT, 에너지저장 등 인프라 전반으로 넓어질 수 있다.
AI 인프라 시장의 가파른 성장도 삼성의 움직임에 힘을 싣고 있다. PwC에 따르면 올해부터 2030년까지 글로벌 데이터센터 누적 자본투자 규모는 5조1500억달러(약 70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단순 환산하면 향후 5년간 매년 평균 1조달러(약 1400조원) 이상의 자금이 데이터센터에 투입되는 셈이다.
데이터센터는 건물을 한 차례 건설하는 것으로 투자가 끝나지 않는다. GPU와 서버 등 핵심 장비는 통상 4~6년마다 교체해야 해 지속적인 투자 수요가 발생한다. 삼성은 반도체·냉각·건설·IT·에너지저장 역량을 결합해 급성장하는 글로벌 AI 인프라 시장에서 그룹 차원의 새로운 성장축을 마련한다는 전략이다.
특히 이번 헬릭스 투자는 삼성이 최근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이어온 전략적 투자의 연장선이다. 삼성전자는 이달 프랑스 AI 기업 미스트랄 AI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대규모 지분 투자에 나섰다. 양사는 삼성전자 반도체 기술·제조 데이터와 미스트랄 AI의 모델 기술을 결합해 반도체 설계와 제조에 특화된 자체 AI 모델을 공동 개발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최근 AI와 바이오·헬스케어 등 미래 성장 분야에 전략적 투자를 이어가며 기존 사업과의 시너지 확대에도 주력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미국 유전자 분석 장비 기업 엘리먼트 바이오사이언스에 1억7500만달러를 추가 투자해 1대 주주 지위를 확보했다.
앞서 지난해 10월에도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이 다중암 조기진단 기술을 보유한 미국 그레일에 1억1000만달러를 투자한 바 있다. 유망 기업에 자본을 투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삼성의 AI·의료기기·디지털 헬스 등 기존 역량과 연결해 새로운 사업 기회를 확보하려는 차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