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박 스틸 주한미국대사가 한국에 경제적 역할 확대를 주문한 배경에는 '안보가 번영의 토대'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한미동맹이 지켜온 안보 위에서 한국 경제가 성장한 만큼 이제는 대미투자와 미국 기업에 대한 공정한 대우로 동맹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것이다. 제이비어 브런슨 한미연합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의 방산·조선 역량을 미군 전력 정비에 활용하는 구상을 내놓으며 경제와 안보의 연결고리를 구체화했다.
스틸 대사는 21일 서울 용산구 몬드리안 서울 이태원에서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가 주최한 오찬 간담회를 통해 "한미 관계를 이끄는 진실은 번영과 안보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연합 전력이 한반도에서 적대행위를 억제해왔기에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고 지금도 주한미군이 경계태세를 유지하며 한국 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이 한국의 대미투자를 동맹 차원의 문제로 강조하는 것도 이같은 인식 때문으로 풀이된다. 스틸 대사는 "우리 무역·투자는 경제에 국한된 게 아니다"며 "안정된 에너지와 경쟁력 있는 조선소,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이 양국 군의 대비태세를 강화한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3.5%로 늘리기로 한 것 역시 억제력과 방위산업을 함께 키우는 투자로 평가했다. 에너지 협력에 힘을 싣는 이유는 AI(인공지능)다. 새로운 AI 기술을 키우려면 막대한 규모의 '지속가능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 내 미국 기업의 처우 개선 문제도 다시 꺼냈다. 그동안 밝혀온 대로 미국 기업이 한국에서 차별 없이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스틸 대사는 고려아연이 미국 테네시주에 짓고 있는 제련소를 예로 들며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더 진출해 성장하길 바라고 미국 기업들도 여기서 공정한 대우를 받길 바란다"고 했다. 디지털 규제에 대해서는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 이후 나아지고 있다면서도 더 개선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역내 안보 위협으로는 중국을 지목하며 한·미·일 협력을 주문했다. 스틸 대사는 "때로는 중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가장 큰 위협"이라며 "모든 교역의 24%가 그 해역을 지나가고 많은 원유와 천연가스가 운송되는데 중국은 그걸 장악하려 하면서 대만, 필리핀 등 다른 나라를 강압적으로 대한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일본과 센카쿠 열도를 두고 다퉈왔으며 한국과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고 짚은 뒤 한미 양자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런슨 사령관은 한국의 조선·제조 역량을 활용한 정비 협력을 넓히자고 제안했다. 그는 "미 해군 함정이 한반도 드라이독에서 정비를 받았는데 본토에서 정비받는 것보다 빠르게 복귀할 수 있었다"며 "이걸 전 영역에서 하면 어떨까 싶다"고 밝혔다. 해양 분야 유지·보수·정비(MRO)에 그치지 않고 적층 제조 등으로 협력 범위를 키우자는 것이다. 장비를 미 본토로 보내지 않고 인도·태평양 안에서 고칠 수 있어야 작전 지속력이 생긴다는 판단으로 풀이된다.
한국 기업을 동맹의 한 축으로 본다는 점도 언급했다. 브런슨 사령관은 재계·산업계 관계자들을 향해 "여러분은 연합방위체제의 불가분한 요소"라며 "거래적인 공급자와 수요자 관계에 안주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어 "미국의 혁신과 한국의 창의성, 대규모 제조 역량 사이에 더 깊고 영구적인 통합을 이뤄야 한다"며 생산과 정비, 기술력이 양국 본토에서 전방까지 이어져야 동맹의 전략적 깊이가 깊어진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