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을 돈이 있는 회사의 사업 매각 대금에 채권자가 압류를 걸어둔 상태였다면 회사가 사업 매각 계약을 취소해도 사업을 사기로 했던 회사가 채권자에게 돈을 줘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단이 나왔다. 계약 당사자들의 사후 합의보다 돈을 받아야 하는 채권자의 권리를 우선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대법원장 조희대)는 29일 김모씨가 바이오가스 발전사업 인수업체 A사를 상대로 낸 추심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전원일치 의견으로 파기하고 사건을 울산지법으로 환송했다. 추심금 소송은 법원 명령을 받은 채권자가 빚진 사람에게 돈을 줄 제3자를 상대로 직접 지급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이다.
B사는 자신들이 추진하던 바이오가스 발전사업을 A사에 8억5000만원에 넘기기로 했다. B사에서 받을 돈이 있던 김씨는 매각대금 중 3억5000만원을 가압류했다. B사로 들어올 돈을 미리 묶어둔 것이다.
김씨는 이후 B사를 상대로 약속한 돈을 달라는 소송을 내 승소 판결을 확정받았다. 가압류한 돈을 직접 받을 수 있도록 법원에서 압류·추심명령도 받았다. 김씨는 이를 근거로 인수업체 A사에 "B사에 줄 돈 일부를 나에게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A사는 김씨의 가압류 이후 B사와 사업 양수 계약을 합의 해제했다며 지급을 거부했다. 거래를 없던 일로 했기 때문에 B사에 줄 사업 대금도 사라졌다는 주장이었다.
1·2심은 인수업체 A사의 손을 들어줬다. 원심은 A사와 B사가 합리적 이유 없이 지급할 돈을 없애려는 목적으로만 계약을 취소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는 2001년 대법원 판결에 따른 것이었다. 앞서 대법원은 채권을 없애려는 목적 등의 특별한 사정으로 계약을 합의 해제한 것이 아니고 다른 합당한 이유로 계약을 합의 해제한 경우라면 채권자에게 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전합은 이번에 판례를 변경했다. 대법원은 압류나 가압류의 효력이 발생한 뒤 당사자들이 계약을 취소하기로 합의하더라도 이를 이유로 채권자에게 돈을 주지 않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계약 취소 합의에 참여하지 않은 채권자 권리가 사라지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논리다.
대법원은 "계약의 효력은 원칙적으로 당사자 사이에만 미친다. 압류채권자는 합의해제 당사자가 아니다"라며 "따라서 합의 해제의 효력이 압류채권자에게 미친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당사자들의 사후 합의로 압류를 무력화하도록 허용하면 채권자에게 지나치게 불리하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대법원은 "사후적으로 압류의 처분금지 효력을 무력화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공평하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부당한 불이익의 방치는 강제집행 제도의 실효성을 크게 떨어뜨린다"고 설명했다.
다만 예외도 인정했다. 대법원은 "법정 해제나 약정 해제 등 계약 관계를 소멸시킬 수 있는 별도 사유의 요건을 갖췄지만 합의 해제의 형식을 취한 것에 불과한 경우, 피압류채권이 계속적 계약에서 발생하는 장래의 지분적 권리인 경우, 압류만을 이유로 합의 해제의 대항력을 부정하는 것이 현저하게 부당하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등은 예외 사유"라고 했다.
예를 들어 B사가 사업을 넘겨주기로 한 약속을 어겨 인수업체 A사가 법적으로 계약을 끝낼 수 있었다면 A사가 김씨에게도 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취지다. 또 인수업체 A사가 B사에 매달 사용료를 내는 계약이었다고 가정하면 계약이 끝나 앞으로 생기지 않을 사용료까지 김씨에게 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다만 이런 사정이 있다는 것은 돈을 주지 않겠다는 측이 증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