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이 미·이란 전쟁 발발 이후 넉 달여 만에 중동사태 피해기업에 10조원이 넘는 긴급 금융지원을 집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원 건수의 99.9%가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에 집중됐다. 정진완 우리은행장이 강조해온 '생산적 금융'이 첨단산업 투자를 넘어 지정학적 위기 속 기업의 생산과 수출, 공급망을 지키는 유동성 공급으로 확장됐다는 평가다.
9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지난 3월2일부터 지난달 28일까지 중동사태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기업에 공급한 신규대출과 만기연장·상환유예 규모는 총 10조4306억원, 2만3607건에 달했다.
이 중 신규대출이 8조272억원(1만7823건)으로 전체의 약 77%를 차지했다. 기존 채무 부담을 덜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원자재 매입비, 물류비 등 실질적인 자금 수요에 대응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만기연장 및 상환유예는 5784건, 2조4035억원이었다.
지원 대상도 중동과 직접 거래하는 수출입기업에 국한되지 않았다. 국제유가와 원자재 상승, 물류 차질, 소비 위축 등의 영향을 받은 36개 세부 업종으로 지원 범위가 확대됐다.
업종별로는 도매 및 상품중개업에 가장 많은 1조4151억원(2947건)이 공급됐다. 원자재와 상품 가격 상승으로 구매·운영자금 부담이 커진 유통기업의 자금 수요가 반영된 결과다. 국제유가와 원재료 가격 변동에 직접 노출된 화학물질 및 화학제품 제조업이 1조3757억원(1108건)으로 뒤를 이었다. 전문직별 공사업에도 9137억원(2508건)이 공급됐다. 이밖에 기계·장비, 식료품, 자동차·부품, 운수·창고, 숙박·음식점 등 생산과 유통, 물류, 소비서비스 전반에 지원이 이뤄졌다.
전체 2만3607건 가운데 2만3579건이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 몫이었다. 건수 기준으로는 99.9%, 금액 기준으로는 94.4%에 달해 위기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소상공인 중심의 자금 공급이 이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에는 신규대출 6조6543억원과 만기연장·상환유예 2조267억원 등 총 8조6810억원이 지원됐다. 개인사업자 지원액도 신규대출 8639억원, 만기연장·상환유예 3058억원 등 총 1조1697억원에 달했다. 대기업 지원액은 5800억원이었다. 신규 자금 공급과 기존 대출의 상환 부담 완화를 병행해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이 생산 중단이나 경영 위기로 번지는 것을 차단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우리은행은 중동 지역과 거래하는 기업의 무역거래 안정성 관리에도 나섰다. 아랍에미리트(UAE)·이스라엘·카타르·쿠웨이트·바레인 등 중동 5개국과 관련된 수출서류 발송 164건, 3520만달러를 집중 관리했다.
중동사태 발생 이전 개설된 수입신용장의 결제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환은행을 두바이지점에서 홍콩지점으로 변경해 43건, 310만달러 규모의 수입거래를 관리했다. 단순히 대출을 공급하는 데서 나아가 수출서류와 신용장 결제 등 기업의 실제 무역거래가 차질 없이 이어지도록 지원 범위를 확대한 것이다.
이번 지원은 정 행장이 취임 이후 강조해 온 생산적 금융의 외연을 넓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첨단산업이나 미래 성장산업에 대한 자금 공급뿐 아니라 글로벌 지정학적 위기 상황에서 기업의 생산과 수출, 고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적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 역시 생산적 금융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전쟁과 같은 지정학적 위기 상황에서 기업에 정말 필요한 건 지원계획 발표가 아니라 제때 집행되는 자금"이라며 "앞으로도 위기에 놓인 기업을 선제적으로 발굴해 생산적 금융의 방향 아래 국내 산업과 공급망을 든든히 뒷받침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