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5년 안에 메모리반도체(이하 메모리) 생산능력을 두 배로 늘리겠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2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6'에서 취재진과 만나 메모리 공급 확대 계획을 밝히며 "(설비투자와 관련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조달하겠다"고 강조했다. 2030년까지 메모리 부족이 이어질 것이라는 게 최 회장의 생각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광주에 대규모 반도체 팹 건설을 검토하는 배경에는 AI(인공지능) 시대의 폭발적인 메모리 수요가 있다. 현재 시장에서는 HBM(고대역폭메모리)뿐 아니라 LPDDR(저전력 D램), 일반 D램까지 전반적인 메모리 공급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없어서 못 파는 수준'의 공급난인데 그것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래서 가격이 급등한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메모리 시장 매출은 지난해보다 163.1% 증가한 5947억달러(약 915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내년에는 7904억달러(약 1216조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D램 시장 매출만 4186억달러(약 644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평택, 용인, 청주 등에서 신규 생산시설 투자를 진행하고 있지만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D램 사업의 영업이익률은 무려 70%를 웃도는 수준이다. 생산능력 확대가 곧 이익과 직결되는 만큼 추가 증설을 미룰 수 없다.
과거 반도체 업계는 호황기마다 공격적인 증설에 나섰다가 이후 공급 과잉으로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다. 그러나 이번 AI발(發)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PC와 스마트폰이 주도했던 과거와 성격이 다르다는 평가다. AI 모델이 고도화될수록 더 많은 메모리가 필요한 구조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상대로 3~5년 이상의 장기 공급 계약 확보에 나서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건설 역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삼성전자와 SK그룹은 충남 등에서 AI 데이터센터 건설을 통해 'AI 생태계'의 완성을 추진한다. AI 데이터센터는 전력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AI의 핵심 생산물인 '토큰'을 생성하는 '지능 공장(Intelligence Factory)'으로 불린다. 삼성SDS와 SK텔레콤 등이 주도적으로 AI 데이터센터 설계·구축·운영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광주가 차세대 반도체 생산 거점으로 거론되는 데에는 정부의 남부권 반도체 벨트 구축 전략이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광주에 첨단패키징 실증센터를 구축하고 '반도체 첨단패키징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패키징 공장 설립 가능성을 우선 검토하는 이유다.
광주에는 글로벌 패키징 기업인 앰코테크놀로지가 생산거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추가 투자도 검토 중이다. 글로벌 AI 산업을 이끄는 엔비디아 역시 조인트벤처(JV) 형태로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에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생에너지 활용 측면에서도 광주는 강점을 갖는다. 인근 지역의 풍부한 재생에너지 자원을 활용해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대응이 가능하고 대학과 연구기관 등 연구개발 인프라도 비교적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는 기회발전특구 또는 재생에너지 자립도시 지정 등을 통해 법인세 감면, 기반시설 지원, 규제 특례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계획이다.
아울러 정부는 카이스트를 중심으로 광주과학기술원(GIST), 전남대, 한국에너지공과대학(KENTECH)을 연계한 반도체 인력양성 체계 구축도 추진하고 있다.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광주와 부산, 구미 등 남부권으로 확장하는 '반도체 클러스터 전국화'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광주를 육성한다는 구상이다.
다만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반도체 공장(팹) 건설은 부지를 확보해 건물을 짓는 것만으로 끝나는 사업이 아니다. 대규모 전력과 용수, 송전망, 협력업체 생태계, 전문 인력 등 생산을 뒷받침할 기반 시설이 함께 갖춰져야 실제 가동이 가능하다.
2021년부터 사업이 본격화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내년 첫 SK하이닉스의 팹 가동이 시작될 예정이다. 사업 계획부터 팹 가동까지 6년이 걸린 셈이다.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잘 갖춰진 수도권이 이 정도다. 삼성전자가 추진 중인 용인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는 지난해부터 토지 보상이 시작됐다.
전력 인프라 구축은 장시간이 소요되는 사업이라는 점도 현실적인 부담이다. 신규 발전소 건설에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데 송전망 구축에서 주민 의견 수렴과 인허가 등을 거치면 사업 기간이 더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 생산시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시점에는 공장 자체보다 전력망이 먼저 확보돼야 하는 만큼 관련 기반 시설을 선제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핵심 과제로 꼽힌다.
용수 확보 역시 필수 조건이다. 반도체 생산은 대량의 공업용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용수 공급 체계를 함께 마련해야 한다. 전력과 용수는 외부에서 공급받을 수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기반 시설 구축에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뒤따른다.
더 중요한 조건은 숙련된 인력과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협력업체가 집적된 산업 생태계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난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기업 투자뿐 아니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전력망과 용수, 인력 등 필수 인프라를 함께 만들어가는 종합 지원 체계가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그린필드(신규 부지)에서 반도체 팹을 건설하는 경우에는 부지 조성과 기초공사, 골조 공사까지 모두 새롭게 진행해야 하는 만큼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며 "특히 전력과 용수 공급 문제가 제때 해결되지 않으면 전체 공정 일정이 더 늦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