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계절, 종이책의 기억[투데이 窓/남수영]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2026.09.22 02:00

문학작품 표지 포장한 편의점 빵 인기
지식 탐색 쉬운 디지털 읽기 대세지만
책장 덮고 생각하는 여유의 공간 필요

가을이 깊어지면 서점과 언론에는 어김없이 독서에 관한 이야기가 늘어난다. 그런데 요즘 풍경은 사뭇 낯설다. 책을 온전히 독파하는 사람보다 책의 분위기를 즐기는 방식들이 회자된다. 며칠 전 문학 작품의 표지를 입힌 편의점 빵이 인기라는 기사를 읽었다. 이른바 '텍스트힙(Text-hip)'이다. 책이 읽는 대상을 넘어 하나의 매력적인 이미지로 포장되고, 그에 맞춰 하나의 유행하는 소비 경험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인터넷 서점에서 사 모은 아기자기한 굿즈들이 처치곤란한 쓰레기처럼 쌓여 있다.

흥미로운 것은 책이라는 사물에 대한 감각적 향수가 실물 책이 일상에서 빠르게 사라져가는 시점에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사라져갈 때 비로소 그 물질성이 도드라지는 법이다. 디지털 화면의 세계가 처음 열렸을 때,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원형은 다름 아닌 종이책과 서재였다. '데스크톱', '폴더', '파일', '문서'라는 명칭은 책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온 인류의 오랜 지식 체계를 고스란히 화면 위로 옮겨온 흔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화면 위에서 더 이상 책장을 넘기지 않는다. 대신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밀어 올리고 미끄러뜨린다.

인류의 독서사를 돌아보면, 이는 기묘한 매체적 회귀다. 고대의 '볼루멘(volumen)', 즉 두루마리는 텍스트가 끊김 없이 펼쳐지는 연속성의 매체였다. 이 연속성을 깨뜨리고 낱장의 종이를 묶어 탄생한 것이 바로 2세기 무렵의 '코덱스(codex)', 즉 오늘날 우리가 아는 사각형의 책이다. 코덱스가 도입한 '페이지(page)'라는 물리적 단위는 지적 역사에서 일대 혁명이었다. 한 페이지라는 닫힌 시공간을 음미한 뒤,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해 이전 장을 시야에서 덮어야 하는 '단절'과 이에 기반한 '선형적 구조'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비로소 인간은 앞선 생각을 토대로 다음 생각을 덧올리는, 구조화되고 복합적인 사유의 형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코덱스의 체제 안에서 활자를 에워싸던 하얀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순수한 질료(hyle)처럼, 무엇이든 깃들 수 있는 잠재성의 공간이다. 책장을 넘기는 손의 촉각, 활자 끝의 여백에 시선이 머무는 찰나, 잠시 책장을 덮고 창밖을 내다보며 딴생각에 잠기는 순간처럼, 독서의 바깥에 놓인 이 지체(遲滯)의 시간은 사유를 숙성시키는 멈춤과 여유의 공간이다.

하지만 스마트폰 인터페이스에서는 코덱스의 페이지가 다시 해체된다. 고대 볼루멘의 연속적인 흐름이 스크롤(scroll)에 의해 디지털 질료로 복원된다. 이러한 화면 속에서는 여백조차 오래 머물지 못한다. 끊김 없이 갱신되는 픽셀의 흐름과 유예 없는 정보의 연쇄 속에서 시선은 멈추기보다 다음 장면을 향해 흐르기 때문이다. 책의 물리적 경계가 사라지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종이라는 재질의 촉감만이 아니다. 텍스트의 틈새에서 호흡을 고르고, 잠시 길을 잃고, 다른 생각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여백의 시간이다.

물론 디지털 책읽기라는 대세를 거부할 수는 없다. 손안의 기기 하나로 방대한 지식을 탐색할 수 있는 시대, 읽기의 외연이 넓어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기를 소비하며 쉼 없이 아래로 미끄러지는 매끄러운 화면 곁에서, 문득 상큼한 잉크 냄새가 나는 묵직한 종이책을 다시 만져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종이책은 다 읽지 않아도 우리 곁에 머문다. 아직 펼치지 않은 책, 읽다가 덮어둔 책, 언젠가 다시 읽겠다고 남겨둔 책은 이미 읽은 내용만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아직 읽지 않은 시간, 언젠가 지켜질 약속,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생각의 가능성까지 함께 품고 있다.

책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든든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가을은 그렇게, 읽기 좋은 계절, 아니 생각할 것이 아직 좀더 남아 있음을 확인하기 좋은 계절이다.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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