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두 가지의 사상사적 기반이 리버럴리스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다 풍요롭게 했다. 민족주의(nationalism)와 인간주의(humanism)다.
현대에 우리 민족 앞에 놓인 현실은 고통에 가까웠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로 인해 남북이 분단돼 서로가 이질적인 체제로 대립하게 됐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 전쟁은 사상자만도 100만명이 넘어섰고 20여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여만명의 전쟁고아가 피눈물 나는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비극의 역사를 만들어 놓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빚어진 한반도 분단의 책임도 일본에 있다. 2차 대전 이후만이라도 세계가 올바른 역사의 길을 걸었다면, 미국이나 소련이 그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분단되지 않았어야 했다. 오히려 전범국가인 일본이 분단됐어야 했다.
나는 이점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상황은 '뒤바꿔진 역사'라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우리 민족 지도자들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은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서로의 분열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들 지도자들은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정치를 자신의 뜻대로 몰고 갔다. 우리 민족의1940년대 후반기의 모습은 이러했고 민족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
우리 민족은 누구인가? 오늘날까지 하나의 민족으로 존속될 수 있었던 기본 바탕은 무엇이었나? 나는 민족문화주의, 즉 민족에 대한 한없는 헌신적 애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상적인 흐름을 받아들였다. 민족주의는 모든 이데올로기의 바탕이 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조상들의 얼, 옛 어른들이 살았던 삶의 터전, 그리고 그들의 일상 속에 배어 있는 가치관, 이런 것들이 민족주의를 이루는 한 요소이다.
민족주의는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 민족문화를 바탕으로 우리 자신을 발전적으로 고양시키는 정신적인 바탕이다. 민족주의는 다른 나라를 배격하고 자기 민족만을 제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민족 제일주의’라는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진정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없다. 민족주의는 자기 나라만 최고라고 생각하는 쇼비니즘(chauvinism)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의 특수한 문화적인 전통에 기반을 둔 민족성원의 정신적 연대의식’이다.
민족주의는 ‘나를 지키되 남과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공존의 이념’이다. 개인 간이나 국가 간에 서로가 배척해서 생기는 것은 분노와 갈등의 손실 뿐이다. 다른 나라의 민족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인정해 줘야 하고 다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해야 한다. 이해와 협력으로 서로의 사이가 참다운 관계로 이어질 때 비로소 평화도 이룩할 수 있다.
자유주의의 바탕에는 인간주의가 있다. 인간주의의 영어표현은 ‘휴머니즘(Humanism)’이다. ‘Humanism'을 ‘인도주의’라고 하기도 하고 ‘인간주의’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인도주의’는 말 그대로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게 들어있다. 도덕률과 가치관에 더 중점을 두는 느낌을 받게 된다. 특히 약자를 돕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논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는 ‘인간주의’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인간주의라고 말할 때는 인간으로서 내 자신부터 먼저 인간다움을 실현해야 한다는 뜻이 더 강하게 들어 있다. 인도주의가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와주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면 인간주의는 내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실현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나와 똑같이 살게 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흔히 ‘적자생존론’이나 ‘승자독식론’과 같은 논리에 매몰돼 우리 스스로를 단련해 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극심한 생존경쟁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처럼 단순한 생물체일 수는 없다. 사람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 다 함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엮어 갈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은 각자 절대적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유의미한 것이라면 인간의 경우는 더 한층 그럴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인간주의는 다른 사람을 나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이고 대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가치에 대한 절대성을 전제해야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나와 다른 지역에서 자랐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병들었다는 이유로, 몸이 완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이야말로 반인간적인 일이다. 그들 모두가 우리와 함께 살 수 있어야 인간주의의 본질이 이룩되는 것이다.
인간주의는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로 여기고 항상 노력함으로써 더 나은 경지로 지향하는 것이다. 인간주의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은 중요한 덕목이다. 특히 정치가에게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정치가는 약속을 매개로 삼아서 자신을 지지해 준 유권자와 연계돼 있다. 약속을 저버리는 일은 자기를 지지해 준 유권자를 저버리는 일이다. 한번 약속한 사항은 어떤 경우라도 꼭 지켜야 하는 것은 인간주의의 한 표현이다. 나도 남도 다 함께 이 세상에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양보할 수 없는 인간주의의 중요한 지향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