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일어난 반(反) 노예제 운동이 단순히 사회적 계몽이나 운동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데는 당시 영국이 처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사회개혁 차원의 진보성을 담보하면서도 영국 정치 시스템의 도덕적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구현한 데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가 주도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이 영국 의회에 제출되고 마침내 통과된 시기는 미국 독립혁명으로부터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까지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역이 혁명의 '위협'에 휩쓸리던 때다. 혁명사상의 전파는 영국 내 사회경제적 모순이 분출되는 계기가 되면서 기존의 국가 시스템과 헌정체제가 전복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영국의 식민지를 벗어나고자 했던 미국은 영국이 정의와 인간성에 반하는 노예무역을 지속하는 위선적 상황을 들어 노예 같은 상황을 강요하는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공격했다. 영국은 자신들의 법체계와 사회 시스템이 모든 시민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비롯해 생명권과 자유권, 재산권 등을 포함하는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는 정당성을 스스로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윌버포스 등 노예무역 폐지에 앞장선 정치가들은 노예제가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는 영국 헌정체제에 반하는 대표적 제도로 지목하고 이를 타도하는 것이 시민들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의 본래적 역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윌버포스는 1787년 노예무역 폐지법안을 준비하기 시작해 1789년 5월 하원에서 처음으로 노예무역 폐지를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또한 캠브리지 대학 시절부터 절친했던 윌리엄 피트 영국 수상을 설득해 '무역-식민지 위원회'를 만들고 노예무역의 비참한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다. 여기서 수집된 증거들은 노예무역 자체가 생소했던 의원들에게 노예무역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됐다.
노예무역 폐지법안은 1789년 처음 제출된 후 1807년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2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이 동안 윌버포스를 비롯해 노예무역 폐지론자들은 13번이나 동일한 법안을 제출했으나 의회 내 노예제 지지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이들은 의회 밖 대중의 지지를 통해 노예무역 폐지 여론을 형성, 반대파에 압력을 행사하는 노력을 병행했다.
각지의 노예무역 폐지협회들에게 청원서를 제출하도록 독려해 의회 안팎의 노예무역 폐지 운동을 연결시켰다. 요크셔에 기반을 둔 의회정치 개혁 단체인 ‘요크셔 협회’를 주도했던 크리스토퍼 위빌이 1788년 런던의 노예무역 폐지위원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규모 청원서 운동을 시작해 지역 하원의원들을 압박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대중여론을 선도하기 위해 곳곳에서 대중집회를 열었고 노예들이 생산한 서인도제도 설탕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윌버포스는 혁명사상에 경도된 급진주의자로 공격받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그가 주도한 노예무역 폐지 운동은 영국을 혁명의 파괴성으로부터 보호하고 영국의 정치와 사회제도의 안정성을 공고히 하는데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