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개성과 주도권을 지닌 대통령 곁에는 막후에서 국정을 조율하는 비서실장이 있다. 대통령의 구상을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행정부와 의회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한편, 필요할 때는 대통령에게도 직언해야 하는 자리다. 미국 역대 비서실장들의 사례에서도 국정 기획력과 협상력, 대통령의 판단에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소신이 핵심 역량으로 꼽힌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두 번째 비서실장 레온 파네타는 정책 기획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한 뒤 메디케어(노인 의료보험)와 저소득층 근로장려세제(EITC) 등을 겨냥한 대규모 예산 삭감안을 내놓자, 파네타는 백악관 경제팀과 함께 균형재정 달성을 위한 10년 계획을 역제안했다.
공화당의 적자 감축 요구를 수용하되 클린턴 대통령의 핵심 국정 과제였던 교육·환경 분야 투자는 유지하고 메디케어 삭감 폭은 줄이는 방안을 마련했다. 공화당의 EITC 축소안에 대해서는 저소득 근로 가구의 세 부담을 늘리는 조치라고 비판하며 여론전도 주도했다. 당시 백악관 정책 차관보였던 윌리엄 갤스턴은 파네타 합류 이후 백악관의 정책 조율 과정이 크게 달라졌다고 평가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첫 비서실장 제임스 베이커는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입법 성과로 연결하는 데 역할을 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은 개인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50%로 낮추고 3년에 걸쳐 매년 10%씩 소득세를 삭감하는 감세안과 정부 지출 축소를 추진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한 상황에서 법안 통과는 불투명했다.
베이커는 백악관 입법전략그룹(LSG)을 활용해 의회 협상을 조율했다. 감세 원안을 고수하기보다 첫해 감세 폭을 낮추는 타협안을 마련하고 레이건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도록 설득했다. 정책 목표를 유지하면서도 의회에서 통과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찾은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수지 와일스 비서실장은 조직 장악력과 직언으로 주목받는다. 강한 개성과 독자적인 판단을 중시하는 트럼프 대통령 아래에서 참모진의 의견을 조율하고 대통령의 결정에 이견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21년 1월 6일 의사당 폭력 사태 가담자에 대한 전면 사면에 반대하며 선별적 사면을 제안했고, 광범위한 관세 부과와 관련해서도 참모진의 의견을 조율할 시간을 달라고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와일스는 지난해 미국 매체 배니티페어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의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와일스를 아버지가 기용한 비서실장 가운데 가장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세 사람의 사례는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뜻을 그대로 관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통령의 구상을 현실적인 정책으로 설계하는 기획력,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능력, 정책의 한계와 부작용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직언이 함께 요구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언론인 겸 다큐멘터리 작가 크리스 위플은 역대 백악관 비서실장들을 인터뷰한 책 『게이트키퍼』에서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쓴소리를 해야 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이재명 정부의 2기 비서실장 인선에서도 대통령의 구상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다른 선택지를 제시하고 판단을 보완할 수 있는 역량이 주요 기준으로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