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을 맞이한 부인에게 생애 처음 1억원짜리 승용차를 선물했다. 차를 산 지 한 달 쯤 지나 고속도로에서 차가 '쿵'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차를 판 회사에서 수리를 해줬지만 같은 현상이 반복됐다. 차를 교환하거나 환불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회사는 거부했다.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차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직접 입증해야 했다. 소비자는 이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결국 환갑을 넘긴 노부부는 차의 결함을 입증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언제 멈춰설지 모르는 차를 직접 몰고 다니다 차가 멈췄을 때 감정인을 불렀다.
현행 법상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문제는 소비자가 기업을 대상으로 피해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제품에 대한 정보도, 전문 지식도, 시간과 비용을 감당할 능력도 부족하다. 소비자는 자신의 피해를 어디까지 입증해야 인정받을 수 있을까.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과 국회 입법조사처는 27일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에서 '국민의 생명·신체 보호 적정화를 위한 민사적 해결 방안의 개선' 심포지엄을 열었다.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한다? 기업 소송에서 책임 '완화·전환' 고민해야
이번 심포지엄의 제3주제인 '입증책임 완화 등 입증 용이화 방안'에 대한 발제를 맡은 권대우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경제 주체(기업)에 대한 배려 때문인지 법원이 선진국과 비교해 소극적인 판결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입증 책임을 완화하거나 책임을 전환하는 방식으로 피해자를 보호하는 일관적인 흐름이 있다"며 "우리도 법원이 입증 책임을 (기업으로) 전환하는 예외적인 사례들을 늘리고 일부 분야에서는 구체적으로 입증 책임의 전환을 법 규정으로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소송 당사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소비자와 기업의 소송에서 정보와 전문지식, 비용 부담 능력 등의 차이로 개별 소비자가 제품 하자와 피해를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권 교수는 "당사자의 능력과 입증에 필요한 전문지식 등을 고려했을 때 오히려 공평하지 못할 수 있다"며 "현대 산업사회에서 발생하는 집단적 피해 사건 등에서 기업의 유책사유와 인과관계를 소비자 개인이 입증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아 입증의 정도를 완화하거나 입증 책임의 당사자를 전환할 필요성이 대두됐다"고 말했다.
증거 채택 여부는 법원 판단에 따르기 때문에 법원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계경문 한국외국어대 로스쿨 교수는 "당사자가 증거를 신청하고 제출하더라도 증거 조사와 수집, 채택 여부는 전적으로 법원의 판단에 따른다"며 "지금처럼 당사자에게 증거를 제시하고 법관을 설득하라는 원칙만 강조한다면 억울한 사람을 양산할 수 있다"고 했다.
또 "현재 재판에 불성실하게 참여하거나 허위 증언을 하는 이들, 불량 감정이 등에 대해 벌금이나 위증죄 적용 등 각종 제재 조항이 있지만 이들에 대해 법원이 관대한 태도를 갖고 있다"며 "이 때문에 당사자와 밀접한 증인, 감정인 등이 양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가 소비자 피해 입증하고, 입증책임 전환 위한 법 개정 필요"
소비자시민모임 부회장을 맡고 있는 백대용 변호사는 소비자 입장에서 필요한 방안으로 △국가가 소비자를 대신해 피해를 입증해주거나 △소비자가 기업에 자료 공개 요청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디스커버리제도를 도입하거나 △입증 책임을 전환하는 등 방법을 제안했다.
백 변호사는 "소비자 입증 책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소비자 문제에 관해 국가가 지정한 각종 전문기관 또는 한국소비자원 등에서 국가의 비용으로 하자나 결함 등을 판단해 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현행 법상 소비자가 회사 내부 자료를 확보할 방법이 없어 이를 해소할 방안이 필요하다"며 한국형 디스커버리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제품을 사용해 피해를 입은, 아무 잘못도 없는 소비자가 과학적·기술적으로 제품의 하자를 증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소비자 문제에 관해서는 법 개정을 통해 입증 책임을 전환해주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에 대해 백경일 숙명여대 법대 교수는 "도입에 찬성한다"면서도 "회사 기밀일 수 있는 부분을 어디까지 공개해야 하느냐는 반박이 있을 수 있고, 제도를 악용해 어마어마한 양의 자료를 제출해서 자료 분석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소송을 지연시키는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며 부작용을 완화시키기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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