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블리]"불효자는 웁니다"

이미호 기자
2019.07.06 06:00

[the L]정한근, 아버지 언급될때마다 통곡

외환위기는 많은 재계의 별들을 'IMF 사태의 책임자'라는 낙인을 찍어 역사속으로 퇴장시켰다. 검찰이 지난 4일 사망한 것으로 결론내린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김선홍 기아차 회장,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등과 함께 '재계판 IMF 4인방'으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세금 2227억원을 체납 혐의를 받고 있는 정 전 회장은 1997년 1월 23일 한보철강이 실제 부도 처리되기 전까지 자신만만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도 후 정 전 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법)상 횡령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2002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3남 정보근을 통해 재기를 노렸지만 연이어 실패했고, 2007년 초에는 징역 3년형(영동대 교비 횡령 사건)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항소했고 신병치료를 이유로 일본에 간다고 속이고 말레이시아로 출국해 수배자 신분이 됐다. 재계 14위, 국내외 32개 계열사를 거느리던 대기업 총수는 결국 12년만에 유골함 안의 '망자'가 되어서야 고국 땅을 밟게 됐다. '죽지 않고서는 돌아올 수 없는 신세'였던 셈이다.

그의 죽음이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한보사태'로 불리는 한보 특혜대출 비리 사건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한보사태는 1997년 1월, 정재계가 유착한 문민정부의 대표적인 부정부패 사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국민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했던 IMF 사태의 발단이 됐다.

한보그룹은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건설하면서 큰 부를 축적했고, 1980년에는 한보철강을 시작하면서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도를 맞는다. 부실기업이던 한보그룹이 은행권으로부터 5조원이라는 큰 돈을 빌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관계 고위인사에 대한 각종 로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가 비리에 직접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됐다. 이 과정에서 당시 정태수 총 회장과 정보근 회장을 비롯해 정치인과 각료, 전현직 은행장 등 금융권 인사 등이 무더기 사법처리됐다.

4남 정한근씨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부친의 사망과 관련된 질문이 나올때마다 통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에콰도르 정부에게 정 전 회장은 '무연고 외국인' 신분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외국으로 모시면서 만리타향에서 돌아가시게 한 것에 대한 회한이 있는 것 같다"면서 "LA로 가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도 유골함을 빨리 고국으로 보내서 정식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검찰에 따르면 정 전 회장이 사망한 시점은 지난해 12월이다. 불과 7개월전으로, 그의 나이 95세까지 살아있었단 뜻이다. 여권까지 위조하며 20년 가까이 타국을 떠돌았던 정한근씨, 타인에게는 큰 피해를 준 사람이지만 본인에게는 아버지였던 정 전 회장을 고향에 모시지 못했다는 후회는 늘 가슴에 남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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