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에 출구로 우르르…축제 환호성은 67명 죽음의 비명이 됐다[뉴스속오늘]

하수민 기자
2023.07.17 05:30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기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국제신보사 주최로 열린 '시민 위안 잔치'가 진행되던 부산공설운동장 모습.

공휴일이던 1959년 7월 17일 오후. 부산공설운동장에서는 국제신보사 주최로 열린 '시민 위안 잔치'로 인파로 가득 찼다. 신나는 잔치가 진행되던 중이던 오후 8시 반. 갑자기 폭풍과 함께 비가 매섭게 퍼붓기 시작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앞다퉈 좁은 운동장 입구를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아수라장이 발생했다. 현장은 삽시간에 엄마를 부르는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죽음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축제로 들떴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살려달라는 비명'이 되기까지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사건은 67명이 압사하고 150여명이 부상을 입게 된 대규모 참사로 남게 됐다.

유명인 보기 위해 신나서 모인 군중 3만명…갑작스러운 소나기 피하다 참변

모두가 힘들고 어려웠던 만큼, TV에서 보던 유명인을 만날 수 있는 지역 축제는 모두에게 일상 속 단비와도 같았다. 이날 7시부터 시작된 '시민위안의 밤'에는 영화배우뿐만 아니라 만담가, 가수까지 유명인이 총출동해,이를 보기 위한 군중이 약 3만명이 모였다.

그런데 실시간 일기예보가 일상화되지 않았던 만큼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다들 놀라 군중은 물결치듯이 동요한 것이다.

주최 측은 마이크를 이용해 동요하지 말고 질서를 유지해달라고 외쳤지만, 군중들은 파도처럼 입구로 밀렸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비명은 한데 엉켜 운동장 안팎을 뒤덮었다.

이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나가려던 출입구는 폭이 7~8m 정도밖에 안 됐으며, 조명도 없는 경사진 언덕길이었다. 인파에 밀린 몇 명이 걸려 넘어지면서 순식간에 도미노처럼 인파가 앞으로 쏠리며 참사가 시작됐다.

설상가상으로 경찰이 밀려드는 군중을 통제한다는 이유로 20여 발의 공포탄을 발사했다. 앞쪽의 군중들은 공포탄 소리를 듣고 잠깐 멈칫했지만, 뒤쪽의 군중들은 소리에 더 놀라 공황을 일으켜 덮치고 밀치는 바람에 참사를 더 악화시켰다.

사고 발생 직후 사망자와 중경상자는 구별 없이 손 닿는 대로 인근 병원에 이송돼 응급치료받았다. 이후 당국의 지시에 따라 부산대학병원으로 집결 수용됐다.

최종적으로 이 사고로 67명이 사망했고 150여명이 상처를 입었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가 발생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압사 사고로 기록됐다.

군중은 3만명 통제 인원은 80명…비좁았던 출입구까지 드러나는 참사의 원인

경찰은 사건이 발생한 직후 이 참사가 발생한 이유에 대해 수사에 나섰다. 참사가 발생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먼저 3만명이 운집한 큰 축제임에도 불구하고 경비 인력이 80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8천평의 운동장에 3만명 이상이 운집할 것이 예상됐지만 당시 경찰은 사복 경관 30명, 정복 경관 50만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폭이 7m가량 되는 출입구도 문제였다. 4만명을 수용하는 운동장인 만큼 여러 개의 비상구를 확보해놨어야 했지만 이날 사용된 출입구는 폭이 넓지 않은 출입구 단 하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참사에 대해 행사를 주최했던 국제신보사측은 사과문을 냈으며 이후 경남도 당국은 사고 다음 날 회의를 열어 △조의금을 모아준다 △사고의 책임은 국제 신보 사가 진다는 등의 결론을 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7월 20일 내무 부장관을 통해 부산공설운동장 참사 사건 희생자 유가족에 조의금을 전달했다. 하지만 이는 시체 1구당 매장비 등으로 소정의 금액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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