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산불 겪고도 무사히 추석을 맞으니 다행이지. 내년엔 풍년이었으면 참 좋겠네."
경북 의성군 농민들은 추석연휴를 복잡한 심경으로 맞았다. 지난 3월 산불의 충격은 여전했지만, 가족과 함께 명절을 맞을 수 있음에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다만 산불 피해로 넉넉한 한가위를 준비하진 못했다. 이들은 내년엔 꼭 풍년이 오길 바라며 일찌감치 농사 준비에 한창이다.
지난달 16일 오전 경북 의성군 신평면 청운2리. 추석을 앞둔 마을의 마늘 농가는 벌써 내년 수확 준비로 분주했다. 양재엽씨(60대)는 집 마당에서 부산에서 올라온 아들네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모종으로 심을 마늘을 다듬고 있었다.
20년 넘게 마늘 농사를 지은 양씨는 3월 산불로 직격탄을 맞았다. 약 150평 규모의 밭이 불길에 휩싸이며 1만개 넘는 마늘을 폐기해야 했다. 농사를 관둘 생각까지 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내년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양씨는 "지난 6월 마늘을 수확했지만, 작황이 매우 안 좋았다"라며 "올해 농사는 사실상 포기했기 때문에 내년을 기대하며 지금부터 종자용 마늘을 다듬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처음엔 큰 충격을 받아 '농사를 접어야 하나?' 싶었지만 가족이 함께 도와주니 든든하다"라며 "추석에도 찾아와 힘을 보태준다고 하니 버틸 용기가 난다"라고 했다.
또 다른 농민 최경순씨(53)의 삶은 산불 전과 후로 갈렸다. 그는 당시 의성고등학교 체육관 대피소로 피신했다. 최씨는 "산에서 불길이 등선을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 생생해 지금도 꿈에 나온다"라고 말했다. 산불의 충격으로 지병이 악화한 아버지는 3개월 전 세상을 떠났다.
이제 최씨는 오빠와 단둘이 남았다. 그는 휑한 마늘밭을 뒷짐 진 채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씨는 "마늘 농사가 망해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넉넉히 준비하지 못할 것 같아 죄송스럽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막막하지만 두 형제가 힘을 합쳐 마늘과 고추 농사를 다시 잘 일구고 헤쳐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현직 농민들만 힘든 게 아니었다. 은퇴한 농민들 역시 피해 농가를 바라보며 남 일처럼 느끼지 못했다. 송명자씨(84)는 지금은 직접 농사를 짓지 않지만, 인근 농가에 재배 비법을 전해줄 때 느끼는 보람을 낙으로 삼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없는 살림에 마늘 농사로 자식들 공부시키고 장가도 보냈다"며 "평생 농사를 지어온 터라 지금 농가들이 겪는 고통이 어떨지 잘 안다"라고 했다. 이어 "추석을 맞아도 마음 편히 보내지 못할 것"이라며 "어찌 됐든 올해 일은 다 잊고 힘을 내서 내년엔 좀 더 나아져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