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
혼인신고를 하러 간 20대 부부는 이 질문을 보고 멈칫했다. "이걸 지금 정해야 돼?" 부부는 당혹스러웠다. 결국 유야무야 '아니요'에 체크 표시를 하고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며칠 후 혼인신고가 완료됐다는 구청 문자를 받은 아내는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라, 남편과 조금 더 논의해보고 결정할걸 그랬다며 뒤늦게 후회했다.
한 30대 부부는 이 질문을 두고 이야기하다 다투기도 했다. 아내는 "태어날 아기에게 내 성을 물려주고 싶다"고 했고, 남편은 "아직 우리나라는 부성 따르는 게 당연한 문화 아닌가"라고 맞섰다. 아내는 희귀한 자신의 성씨가 끊기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며 엄마의 성을 물려주길 원했으나, 남편은 집안을 설득할 명분이 부족하고 아이가 사회적 시선으로 직면할 어려움이 우려된다며 반대했다.
이 밖에도 "아직 아이 계획도 없는데 혼인신고 때 당장 결정해야 되는 거냐", "이런 게 있는지 처음 알았는데 결혼 전 조율할 게 하나 더 생겨버렸다" 등 혼란스럽고 부담스럽다는 반응이 잇따르고 있다.
혼인신고서에 적힌 해당 질문은 현행 민법에 근거하고 있다. 민법 제 781조 1항에 따르면 자녀는 부의 성과 본을 따라야 한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다. 2항에는 부가 외국인인 경우 자녀가 모의 성을 따를 수 있다고 돼 있으며 3항에는 부를 알 수 없는 자가 모의 성을 따른다고 규정돼 있다.
이는 모두 부의 성을 따를 수 없을 때 예외적인 경우 모의 성을 따를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20여년 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반드시 부의 성과 본을 따라야 하는 '부성 강제주의'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부성 우선주의'가 남아있는 셈이다.
만약 부부가 합의해 자녀에게 엄마 측 성을 물려주기로 했다면 혼인신고서와 함께 별도의 협의서를 제출해야 한다. 협의서에서는 "위의 부와 모 사이에서 태어날 모든 자녀의 성과 본을 모의 성과 본으로 정하기로 협의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으며 부부의 신분 증명을 요구한다. 부부 중 한 명이 출석하지 않았다면 불출석한 당사자의 인감증명서나 서명에 대한 공증서가 첨부돼야 한다.
혼인신고 시 부의 성을 따르기로 결정했다가 나중에 이를 변경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이혼 후 다시 혼인신고를 하면서 모의 성을 따르겠다고 선택하거나, 가정법원에 자녀의 성·본 변경 심판을 청구해 자녀 복리를 위한 필요성을 직접 증명하는 것이다.
전문가들도 모성 선택권에 대한 홍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관련 제도 또한 불공평하게 설계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송효진 선임연구위원은 "제도를 개정했지만 활용도를 높이려는 취지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어쩔 수 없이 개정한 것처럼 보인다"며 "홍보가 부족해 제도를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라고 지적했다.
이어 "부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고 모성을 따르려면 별도 협의와 절차를 거치게 한 구조는, 예외 상황을 선택했으니 불편을 감수하라는 식"이라며 "이는 매우 불평등하며 선택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라고 비판했다.
특히 혼인신고 시점에 자녀의 성을 미리 결정하도록 한 현행 제도 역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송 연구위원은 "자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성을 정하도록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논의하기 어렵고, 결혼 초기 단계에서 선뜻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다"며 "실체도 없는 자녀의 성을 혼인신고 때 정하라는 것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녀의 성은 출생신고 시점에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출생신고 시로 시점을 바꾸더라도 오랜 관습상 부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겠지만, 최소한 부부가 충분히 고민하고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넓어질 것"이라고 제언했다.
또 현행 법이 오히려 모성 선택에 대한 편견과 낙인을 조장하고 있다는 지적도 내놨다. 법부터 부모의 성을 대등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개정된다면 모성을 따랐을 때 발생하는 차별적인 시선과 사회적 불편함도 점차 해소될 수 있다는 취지다. 송 위원은 "법이 바뀐다고 해서 당장 모성 선택이 급증하진 않겠지만, 예외가 아닌 당연한 선택지로 인정받는 것 자체가 인식 개선의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햇다.
실제 모성을 따른 사례는 드물게 포착된다. 최근 결혼 준비 온라인 카페에는 "모계성을 따르는 것에 대해 양가 다 그렇게 하라고 했고, 남편과도 잘 얘기해서 성씨는 엄마 성을 따르되 이름은 아빠가 지어주기로 했다"며 "남편 성이 상대적으로 흔해서 희귀한 제 성씨를 물려주기로 협의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댓글창에는 "실제로 진행시킨 경우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와 멋있고 신기한 이야기다", "시댁 어르신들이 동의하신 게 엄청 깨어 계신 분들인 것 같네요", "저도 제가 흔치 않은 성씨면 물려주고 싶을 것 같다" 등의 반응이 나왔다.
최연소 합격으로 이름을 알린 김수민 전 SBS 아나운서는 2022년 결혼을 발표하면서 자녀에게 자신의 성을 물려주기로 남편과 협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 전 아나운서는 "난 몰랐는데, 알고 보니 혼인신고 시에 태어날 자녀 성씨를 정할 수 있었다"며 "신랑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아버지 성을 무조건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고, 우리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날 설득해줬다"고 했다.
그해 2월 제출한 혼인신고서 일부를 공개하면서 "엄마 성씨를 물려주겠다는 협의서를 냈다"며 "성 평등한 세상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가정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부는 2021년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통해 자녀 성 결정을 '부모 협의 원칙'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민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지만, 정부 교체 후 논의가 중단되며 사실상 백지화된 바 있다.
하지만 성평등가족부가 제5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26~2030년)에 부성 우선주의 원칙 개선을 다시 포함시키면서 재검토에 들어갔다. 부성 우선주의 폐지 및 모성 선택권 시점 확대 등을 다각도로 검토할 예정이다.
성평등가족부 관계자는 "아직 방향성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5개년 계획에 담겨 있다"며 "연차별 시행계획 수립 시 구체적인 방안이 나올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