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 송강호, 김윤석, 설경구, 황정민, 류승룡. 대한민국 영화계를 20여 년 넘게 이끈 선배들의 뒤를 이을 만한 후배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 있다. 바로 요즘 충무로에서 가장 각광받는 '실력파 배우' 노재원이다. 충무로 정통 연기파의 계보를 이을 만한 독보적 인재로 꼽히는 그다.
'박하사탕'으로 설경구가 등장했을 때의 충격이 떠오른다고 할까. 매 작품 등장할 때마다 화면을 압도하는 미친 존재감을 발산하며 뇌리에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 어떤 역할을 맡겨도 그 인물 자체로 완벽히 녹아든다. 넷플릭스 'D.P. 시즌 2',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살인자ㅇ난감', 디즈니 '삼식이 삼촌', '오징어 게임 시즌 2'까지. 그는 매번 전작의 얼굴을 지워내며 새로운 인물로 변신해 왔다.
그런 노재원이 한국 범죄 영화의 대표 프랜차이즈인 '타짜: 벨제붑의 노래'를 통해 첫 상업영화 주연 자리에 섰다. 청소년관람불가라는 핸디캡 속에서도 흥행 순항을 이어가며 평단과 관객의 찬사를 동시에 이끌어내고 있지만, 인터뷰 자리에 마주 앉은 그는 여전히 쑥스러운 듯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꿈만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결코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제가 당연히 캐스팅될 자격이 있어서라기보다, 운 좋게 제게 찾아온 선물 같은 기회니까요. 부족한 점이 있다면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쳤을 뿐입니다."
첫 상업 영화 주연작… '타짜: 벨제붑의 노래'
한국 영화사에서 '타짜'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노재원을 주저 없이 움직이게 만든 것은 프랜차이즈의 후광이 아닌, 대본이 품은 독창적인 질감이었다.
"많은 분들이 시리즈에 대한 부담감을 물으셨어요. 하지만 만약 전작들의 그늘 속에 안주하는 이야기였다면 매력을 덜 느꼈을 겁니다. 기존 '타짜'와는 결이 완전히 달랐거든요. 상업영화 첫 주연이라는 타이틀을 떠나, 박태영이라는 인물이 지금 내게 온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나만의 방식으로 이 세계를 표현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죠."
원작 만화 속 박태영은 훨씬 더 자극적이고 방대한 서사를 지닌 인물이다. 2시간 남짓의 압축된 영화적 호흡 안에서 이를 온전히 살려내기 위해, 그는 원작의 내레이션과 지문을 곱씹으며 인물의 밑바탕을 단단히 다졌다.
"캐릭터를 준비하는 정해진 루틴은 없어요. 매번 그 인물만을 위한 창의적인 방식을 찾으려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때는 공시생의 마음을 체화하려 노량진에서 매일 컵밥을 먹었고, '오징어 게임' 때는 감각을 깨우기 위해 클럽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췄죠. 이번 박태영을 준비할 때는 제 삶에서 분신과도 같은 가장 친한 친구와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친구에게서 받은 영감이 박태영이라는 인물의 살과 피가 되었습니다."
지독한 열등감과 인정 욕구의 소유자, 박태영
극 중 박태영(이하 박태)은 오랜 벗인 장태영(변요한)을 배신하고 파국으로 몰아넣는 갈등의 중심축이다. 결과만 놓고 보면 냉혹한 빌런이지만, 노재원은 결코 그를 손쉽게 '악인'이라 단정 짓지 않았다.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박태를 못된 놈이라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도구로 소비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촬영 분량 중에는 고교 시절 반장이자 전교 1등이었던 장태의 그늘 아래서 인정받지 못하고 괴롭힘당하던 박태의 과거 장면들이 있었어요. 비록 영화적 호흡을 위해 편집됐지만, 그런 결핍이 박태의 뼈대였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동경한다는 건 축복인 동시에 가장 잔인한 불행이잖아요. '나도 내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 뭔가를 성취해보자'는 처절한 자기합리화, 그 변명을 찾아주는 것이 배우로서의 제 몫이었습니다."
노재원은 인물의 비극성이 정점에 달하는 태희와의 장면에 대해서도 깊은 고뇌를 털어놓았다. 영화 속에서 박태는 자신이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장태희가 모든 비밀을 알게 되자 끝내 살해한다.
"태희를 해치는 장면은 솔직히 지금도 다시 마주하기가 힘듭니다. 편집됐지만 원래는 박태가 태희에게 진심으로 구애하고 고백하는 장면들이 많았어요. 키워준 누나이자 진심으로 연모했던 여인이었기에 그 장면을 연기하는 게 너무 두렵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장태를 배신했다는 사실, 이 불법적인 판이 들통나선 안 된다는 생존 본능이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았죠. 사랑과 연민을 붙잡고 있을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특히 '악마 같은 새끼'라는 말을 듣고 뺨을 맞았을 때,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나를 악마라 부르는가'라는 뒤틀린 억울함이 결국 방아쇠를 당긴 계기가 됐다고 봤습니다."
맹수들의 맞대결… 변요한과의 뜨거운 화학작용
디즈니 '삼식이 삼촌'에 이어 다시 조우한 변요한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당시 많은 분량을 함께하지 않았음에도 변요한은 노재원의 든든한 지원군을 자처했다.
"'삼식이 삼촌' 이후 어느 날 밤에 선배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시상식 이후 주눅 들어 있던 저에게 '재원아, 난 네 연기가 맞다고 본다. 널 리스펙트한다. 넌 꼭 주연을 해야 한다'며 확신을 심어주셨죠.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타짜'에서 가장 뜨겁게 부딪히는 두 인물로 마주하게 된 겁니다. 감회가 남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뜨거운 선배를 마주하려면 내가 어떤 무장을 해야 할까'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 긴장감은 후반부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카드 게임 신에서 폭발했다. 각자의 서사를 쌓아가다 마침내 도박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의 텐션은 현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시나리오 지문에 '맹수 둘이 눈을 마주친다'고 적혀 있었는데, 막상 앉으니 도저히 눈을 못 마주치겠더라고요. 눈을 마주치는 순간 연기가 가짜가 될 것만 같았어요. 감독님도 처음엔 왜 시선을 피하냐고 하셨지만, 이내 이 서먹하고 날 선 긴장감이 더 리얼하다고 인정해 주셨죠. 선배 쪽을 촬영할 때는 장태의 감정에 동화돼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는데, 제 쪽으로 앵글이 넘어오자 선배님이 눈빛과 톤을 완전히 차갑게 바꿔주시더군요. 덕분에 저 역시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냉혹하게 박태의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립되는 연기를 넘어, 밝고 따뜻한 에너지를 전하기까지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 등을 수상하며 독립영화 신에서부터 차근차근 입지를 다져온 노재원. '연기파'라는 세간의 수식어 앞에서도 그는 손사래를 치며 여전히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투자를 유치하는 과정부터 배웠습니다. '재원아, 투자 확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감사함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정작 슛이 들어가면 제 연기에 매몰되어 주변을 돌보지 못했어요. 지금까지는 제 안의 바가지를 박박 긁어내듯 스스로 외로움을 택하며 처절하게 연기해왔거든요. 제 연기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는 게 단점이기도 했고요."
치열했던 산통을 겪어낸 그는 이제 한 걸음 물러나 주변을 품을 줄 아는 성숙한 여유를 갈망하고 있다.
"배우는 늘 새로워져야 하지만, 의도적으로 새로움을 꾸며내기보다 제 삶 자체가 자연스럽게 넓어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혼자 고립되는 연기가 아니라, 현장의 동료들을 아우르고 주변을 살피며 다 같이 완성해가는 기쁨을 맛보고 싶어요."
그의 시선은 이미 다음 계절을 향해 있다. 차기작으로 선택한 1인극 연극 '내게 빛나는 모든 것'을 통해 관객들에게 따뜻한 위안을 건넬 채비를 마쳤고, 새로운 장르를 향한 유쾌한 욕심도 덧붙였다.
"그동안 날카롭고 결핍된 인물들을 주로 보여드렸지만, 실제의 저는 장난기도 많고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미움 대신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안을 줄 수 있는 평범하고 다정한 인물을 꼭 해보고 싶어요.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제대로 된 로맨틱 코미디에도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생전 안 해보던 외외모 관리도 받고 운동도 열심히 하며 제 자신을 정성껏 가꾸고 있어요. 어떤 옷을 입혀주셔도 그에 맞게 완전히 새로워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