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여성 미술가들을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역시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임을 알리고자 했습니다."(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
멈췄던 여성 미술가들의 시간이 다시 흐른다. 리움미술관은 현대미술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도 주목받지 못했던 1세대 여성 작가들을 조명하는 기획전을 연다. 한국과 브라질, 일본, 아르헨티나 등 각지의 여성 미술가들이 펼친 선구적인 작업들을 처음으로 부각하는 무대다.
지난달 29일 리움미술관이 한 발 앞서 공개한 '다른 공간 안으로 :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의 가장 큰 특징은 체험이다.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안으로 들어가 예술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넓으면서도 다양한 조명이 갖춰져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리움미술관의 공간적 특성을 십분 활용해 실제 작업을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리움미술관은 이 같은 특징이 여성 미술가들의 '환경 작업'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환경 작업'은 관객이 작품 속에서 예술을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진 작업으로 '설치 미술'의 모태가 됐다. 일본의 야마자키 츠루코의 '빨강'을 시작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환경/예술' 전시까지 20여년간 여성 미술가들이 펼쳐온 '환경 작업'의 역사를 복합적으로 들여다본다.
2023년 전시를 처음 기획한 안드레아 리소니 하우스 데어 쿤스트 예술감독과 마리나 푸글리에세 밀라노 MUDEC 관장은 "환경 예술의 역사는 곧 파괴와 소실의 역사"라며 "당시 작업들은 보존하기 어려운 실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 작가들은 미술사와 환경 예술의 역사 양쪽 모두에서 지워지는 이중의 소외를 겪었다"고 말했다.
1970년 전시 도중 정치적인 이유로 강제 철거됐던 1세대 여성 행위예술가 정강자의 '무체전'이 인상적이다. 검은 장막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으로 들어가면 연기가 흘러나오고 조명이 비치며 작가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정강자는 우리나라 최초로 누드 퍼포먼스를 시도하는 등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잇달아 펼쳐온 진취적인 미술가지만, 전위예술이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군사 정권에 의해 탄압받았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작품 '드림 하우스'도 흥미롭다. 미국을 상징하는 예술가 마리안 자질라가 남편인 라 몬테 영과 구상한 60년 전 작품(1966년)으로, 다양한 빛으로 물들여진 공간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파동 음향이 재생되는 독특한 구성이다. 우리나라의 미디어 아티스트 최정희 작가가 합류해 세대를 가로지르는 협업을 선보인다.
리움미술관은 이미 사라진 여성 예술가 11명의 작품을 되살리기 위해 당시의 설계도부터 편지, 사진 등 수많은 자료를 연구했다. 주류 미술사가 무의식적으로, 때로는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작업들을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이번 전시는 봉인된 역사적 장르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형식으로 거듭나게 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KB금융그룹과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가 후원한다. 오는 5일 리움미술관에서 개막해 11월 29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