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장 풀린 스위스 계좌…신고금액 수십배 늘었다

세종=정현수 기자
2016.02.21 08:49

지난해 국내에 신고된 스위스계좌 1007억원…2018년부터 스위스를 비롯한 97개국 금융정보 맞교환

‘검은 돈’의 종착점이라는 오명을 들었던 스위스가 변하고 있다. 스위스는 2018년부터 전 세계 97개국과 금융정보를 주고 받는다. 한국도 포함된다. 비밀주의의 온상이었던 스위스가 변하자 거액 자산가들도 분주해졌다. 국내 자산가들이 스위스 계좌 신고금액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회자되던 스위스 계좌의 비밀도 조금씩 벗겨지고 있는 셈이다.

19일 기획재정부와 국세청에 따르면 내년 9월부터 다자간 금융정보 자동교환 협정이 적용된다. 한국을 비롯해 네덜란드, 벨기에, 아일랜드 등 56개국이 조기 시행국이다. 조세피난처로 유명한 버뮤다와 버진아일랜드 등도 이 협정 대상이어서 한국과 금융정보를 맞교환한다.

2018년부터는 스위스를 비롯해 41개국이 다자간 금융정보 자동교환 협정을 이행해야 한다. 특히 스위스의 경우 국내법에 따라 양자간의 공동선언문을 서명해야 협정의 효력이 생긴다. 기재부가 지난 18일 스위스와 공동선언문에 사인한 배경이다.

2018년부터 스위스와 매년 교환하게 되는 금융정보는 계좌의 소유자와 주소, 계좌번호, 금융기관 이름, 계좌잔액 등이다. 단체계좌는 25만 달러 이상일 경우에만 정보가 교환되지만, 개인계좌의 경우 금액 제한이 없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자산가들이다. 스위스는 1934년 은행비밀법을 제정하면서 10만 프랑(약 1억2450만원) 이상을 예치하면 숫자와 문자로만 구성된 계좌로 입출금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예금주의 이름을 쓸 필요도 없었다. ‘스위스 비밀계좌’도 이런 제도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스위스가 검은 돈과 역외탈세의 중심지라는 시각이 퍼지면서 국제사회는 스위스에게 금융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중심으로 다자간 금융정보 자동교환 협정을 추진했고 2014년 성사됐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과 스위스는 2012년 이중과세방지협정을 개정했다. 서로 금융정보를 주고 받는다는 내용이다. 다만 상대방이 원할 경우라는 단서를 달았다. 위기감을 느낀 자산가들은 서둘러 정부가 권한 신고절차를 밟았다. 정부는 2011년부터 10억원 이상의 해외금융계좌를 신고하도록 했다.

2011년 스위스 계좌 신고금액이 73억원은 불과했으나 이중과세방지협정의 영향으로 2012년 신고액은 1003억원으로 치솟았다. 2013년과 2015년에는 신고금액이 각각 968억원, 1007억원이었다. 2014년 실적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다자간 협정의 영향으로 신고금액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역외탈세를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따라 스위스 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 개설된 해외계좌 역시 국내 신고금액이 증가하는 추세다. 2011년 11조5000억원 수준이었던 해외계좌 신고금액은 2015년 36조9000억원을 기록했다.

미국 계좌의 경우 지난해 신고금액이 처음으로 연간 1조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6월 한미 금융정보 자동교환협정(FATCA)이 정식 서명됐고 국회 비준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에 신고된 해외계좌는 총 134개국으로 집계됐다.

박근보 하나은행 서압구정골드클럽 PB팀장은 “FTACA를 앞두고 상당수의 자산가들이 이미 신고를 하거나 포트폴리오를 변경했고, 일부는 영주권을 포기했다”며 “다자간 협정을 앞두고도 이미 신고절차를 상당수 밟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역외탈세 방지를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는 자진신고에 한해 과태료와 형사상 처벌을 면제해주는 ‘미신고 역외소득·재산 자진신고제도’를 운영 중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자진신고 기간 초기에는 관망하는 분위기였지만 마감이 다가오면서 신고건수도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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