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출발은 정치적 통합이 아닌 경제 협력이었다. 매개체는 에너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와 독일은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출범시켰다. 군수 산업 핵심 자원을 초국가적 기구 아래 두겠다는 발상이었다. 이 협력은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거쳐 오늘날 EU로 확장됐다.
한일 경제 협력 논의가 재점화되면서 'EU의 출발점'이 다시 주목받는다. 외교·안보 리스크를 피해 에너지 협력부터 시작하는 방식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판단에서다.
한국과 일본은 세계 최대 액화천연가스(LNG) 수입국이다. 일본은 세계 2위, 한국은 3위다. 자원 빈국이면서 제조업 비중이 높아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다. 전력·가스 수요가 크고 에너지 안보에 취약하다는 점도 닮았다.
에너지 분야가 최우선 협력 후보로 꼽히는 이유다. 특히 LNG는 장기 계약 중심의 수입 구조다. 공동 구매나 물량 조정만으로도 가격 협상력과 공급 안정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다.
에너지 협력의 기초 단계는 '에너지 스와프(swap)'다. 이미 한일 간 LNG 스와프는 진행 중이다. 특정 시점에 한 나라가 확보한 LNG 물량을 상대국에 넘기고 이후 다른 시점에 동일한 물량을 돌려받는 방식이다. 가격 차익보다 수급 안정과 저장 효율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실제 사례도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한국은 일본에 LNG 총 7카고(카고당 약 6만톤)를 스와프 형태로 지원했다. 일본 전력 수급 위기의 '소방수' 역할을 했다.
최근에도 협력이 이어졌다. 지난해 7~8월 한일 양국은 LNG 약 6만5000톤을 맞교환했다. 특별한 정치적 이벤트 없이 실무 차원에서 이뤄진 협력이다.
정부도 적극적이다. 공동 구매는 장기 계약 시점, 수요 물량, 계약 조건 등을 동시에 맞춰야 해서 까다롭다. 반면 스와프는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정치적 부담도 적고 기업간 실무 중심으로 추진할 수 있다.
현재 산업통상부·한국가스공사와 일본 경산성·JERA(제라) 간에는 정기적인 소통 채널이 가동 중이다. LNG 가격 재협상이나 계약 만료 시점에 맞춰 정보 공유가 이뤄지기도 한다.
가스업계 관계자는 "한쪽은 저장 여력이 부족하고 다른 쪽은 여유가 있을 때 스와프는 서로에게 이득"이라며 "에너지 안보를 공동 관리하는 초기 단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중장기 키워드는 수소와 암모니아다. 일본은 '수소 사회' 구축에 적극적이다. 한국도 인프라 확장에 힘을 쏟고 있다. 양국 정부간 수소 협력 채널도 있다.
기업이 먼저 움직인다. 현대자동차와 도요타가 대표적이다. 양 회사는 수소 모빌리티 분야에서 협력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해온 대표적인 한·일 기업이다. 양사는 수소전기차(FCEV)와 생태계 확대를 위한 협력 가능성을 열어뒀다. 기술 표준과 인프라 구축에서 손을 잡을 명분이 충분하다.
최정환 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일 경제 협력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분야는 수소"라며 "중장기적으로는 한일 협력을 상징하는 분야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일 에너지 협력의 관건으로 속도보다 지속성을 꼽는다. 과거 한일 협력은 정권 변화나 외교 갈등 때마다 중단됐다. 작은 협력의 축적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최 부연구위원은 EU 사례를 언급하며 "EU도 석탄과 철강 같은 제한된 영역에서 협력을 시작해 경제 공동체로 점차 확장해 나갔다"며 "한일도 처음부터 구속력 있는 큰 틀을 만들기보다는 실무 차원의 협력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