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장기전세주택에 입주한 가구 상당수가 최장 20년의 거주기간을 채우기 전에 집을 마련하거나 민간 전세로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세보다 낮은 보증금으로 주거비 부담을 낮추고 그만큼 저축과 청약에 활용하면서 장기전세가 단순한 임대주택 제공을 넘어 '주거사다리'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도입 20년을 맞아 내년부터 첫 만기 퇴거가 시작되는 가운데 서울시는 기존 장기전세주택을 다시 무주택 시민에게 공급해 주거 안정의 순환 구조를 이어갈 계획이다.
8일 서울시에 따르면 이달 기준 장기전세주택의 계약기간 만료 전 퇴거 가구는 1만5529가구로 집계됐다. SH공사의 누적 공급량의 약 34%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 중 82.4%는 자가 구입이나 민간 전세 이동 등을 이유로 계약자의 요청에 따라 이뤄진 자발적 퇴거다.
장기전세주택의 최장 거주기간은 20년이지만 실제 퇴거 가구의 평균 거주기간은 7년 6개월에 그쳤다. 최대 거주기간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장기간 거주할 수 있는 안정성을 확보한 뒤 주거비를 아끼고 자산을 축적해 다음 주거 단계로 이동한 가구가 적지 않았다는 의미다.
2022년 SH가 진행한 서울시 공공임대주택 입주자 패널조사에서도 이 같은 경향이 확인됐다. 2016~2021년 장기전세주택에서 퇴거한 1708가구의 평균 거주기간은 8년 4개월이었다. 퇴거 후 자가에 거주한 비율은 72.0%로 나타났다. 전체 공공임대주택 퇴거자의 자가 거주 비율인 60%보다 12%포인트 높았다.
장기전세의 가장 큰 장점은 상대적으로 낮은 주거비다. 2026년 장기전세주택의 평균 보증금은 2억9300만원으로 KB부동산이 집계한 올 8월 기준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가격 7억1178만원의 약 41% 수준이다.
현재 거주 중인 장기전세주택의 보증금과 인근 단지 평균 전세 시세의 차이를 합산하면 주거비 절감 규모는 약 10조원으로 추산된다. 시세보다 낮은 보증금으로 거주하면서 전세대출 부담을 낮추거나 남은 자금을 저축·청약 등에 활용할 수 있었던 셈이다. 장기전세는 입주 당시 보증금을 인근 아파트 전세 시세의 80% 이하로 책정하고 보증금 인상률도 연 5% 이내로 제한해 민간 전세시장보다 낮은 주거비를 유지해왔다.
실제 장기전세 입주민들은 절감된 주거비를 자산 형성에 활용했다. 2022년 SH 패널조사에서 장기전세 입주 가구의 69.9%가 매월 평균 62만5000원을 저축하고 있었으며 청약통장 보유율도 83.7%에 달했다. 향후 희망 주거 형태를 묻는 질문에는 61.3%가 민간아파트로 이사하기를 희망한다고 답했다.
장기전세의 주거 안정성이 자산 형성과 주거 상향 이동을 위한 '시간'을 제공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일반 임대차계약의 최장 계약기간이 4년인 것과 비교하면 현재 거주 중인 장기전세 가구의 평균 거주기간은 약 10년으로 두 배 이상 길다.
입지와 주거환경도 장기전세의 주거 안정성을 뒷받침했다. 전체 장기전세주택 단지의 45%가 지하철역 반경 500m 이내에 있고 83%는 초등학교를 걸어서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입지·주거환경의 뒷받침 속에서 잦은 이사 없이 기존 직장과 학교 등 생활권을 유지하면서 주거비를 줄이고 자산을 쌓을 수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장기전세는 현재까지 총 3만8296호가 공급됐다. 장기전세를 거쳐간 가구를 모두 합치면 4만5715가구에 이른다. 장기전세주택은 택지개발 등을 통해 공급하는 건설형과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에서 확보하는 매입형으로 나뉘어 서울 전역에 공급됐다. 5월 말 기준 SH공사가 보유한 서울시 공공임대주택 가운데 약 12%를 차지한다.
서울시는 내년 310호를 시작으로 2031년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장기전세주택 약 9300호를 반환받아 청년·신혼부부 등을 위한 '미리내집'과 장기전세주택으로 재공급할 계획이다. 최장 20년 거주와 분양전환 불가라는 기존 원칙도 유지한다.
2007년 최초 입주자 모집공고와 임대차계약 단계에서부터 '최장 20년 거주·분양전환 불가'를 명시한 만큼 만기 이후에는 해당 주택을 다른 무주택 시민에게 공급하는 공공임대의 순환 원칙을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만기 가구 중 소득·자산 등 입주요건을 충족하는 경우에는 영구·국민임대 등 가구 여건에 맞는 다른 공공임대주택을 연계한다. 서울시는 자치구 주거안심종합센터 등을 통해 이주 상담과 이용 가능한 금융지원 정보도 안내할 예정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장기전세주택은 주거 걱정을 덜고 자산을 모아 내 집 마련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라며 "내 집을 마련해 비워진 주택이 다음 무주택 시민의 기회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지속하고 장기전세주택이 서울시민의 희망의 주거사다리로 자리 잡도록 꼼꼼히 챙기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