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실증 중인 전기차-전력망 연계(V2G)는 태양광·풍력 등 분산된 소규모 전원이 늘어나면서 전력망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활용되는 '유연성 자원'의 한 종류다. 유연성 자원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라 발생하는 출력제어를 줄이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20%에 달하는 제주와 태양광 발전시설이 밀집한 호남에서 유연성 자원 확대가 추진되는 이유다.
출력제어는 전력 수요보다 발전량이 많아질 때 전력망에 과도한 전기가 흘러 장비 고장이나 정전이 발생하지 않도록 발전량을 강제로 줄이는 조치를 말한다. 태양광은 햇빛이 강한 낮 시간대에 발전이 집중되는 특성이 있어 전력이 남는 시간이 발생하기 쉽다. 이때 전력망이 이를 모두 받아들이지 못하면 생산된 전기의 일부를 버려야 한다. 발전사업자에게는 손실이 되고, 전력망 운영 측면에서도 비효율이 발생한다.
흔히 재생에너지가 많은 지역의 계통이 '포화됐다'고 표현하지만, 유연성 자원을 적절히 활용하면 대규모 송전망을 추가로 건설하지 않고도 계통 혼잡을 일정 부분 완화할 수 있다. 김건호 전력연구원 배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실제 전력망 운영을 보면 하루 중 일부 시간대에만 전력 사용이 일시적으로 크게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며 "그 짧은 시간의 수요 증가 때문에 새로운 선로나 설비를 건설해야 하는데 유연성 자원을 활용하면 추가 투자 없이도 기존 전력망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유연성 자원으로는 배터리에너지저장장치(BESS)와 양수발전이 꼽힌다. 다만 양수발전은 대규모 시설 건설이 필요하고 사업 기간도 길다. 이에 따라 정부는 단기적으로는 BESS를 중심으로 계통 유연성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로 양수발전과 병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2023년 제주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중앙계약 방식 경쟁입찰을 도입해 계통 연계형 BESS 보급을 확대하고 있는 배경이다.
이 입찰제도는 대규모 BESS 사업자를 경쟁입찰로 선정해 약 15년간 수익을 정산해 주는 구조를 갖고 있다. BESS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방전하는 기능뿐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출력(전력량)을 늘리거나 줄여 전력망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도 한다. 낮에 남는 태양광 전력을 저장했다 저녁처럼 전력 수요가 많은 시간대에 공급할 수 있도록 약 6시간 동안 긴 시간 전력을 방출할 수 있는 BESS가 주요 입찰 대상이다.
저장 장치만이 유연성 자원은 아니다. 수요반응(DR)과 V2G와 같이 전력 소비를 조정해 계통 균형을 맞추는 수요측 유연성 자원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수요반응은 전력 공급이 부족하거나 수요가 급증할 때 사전에 약정한 기업이나 일부 가정이 전력 사용을 줄이고 그 대가를 받는 제도다. 한국에서는 2014년 수요자원거래시장이 도입됐고, 그리드위즈와 같은 기업들이 이 시장에서 사업을 확대해왔다.
전력시장이 개방된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러한 유연성 자원이 한국보다 먼저, 더 활발하게 도입·상용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V2G 서비스가 일부 전기요금제와 연계된 형태로 등장해 시범사업과 상용사업이 함께 진행되고 있으며, DR 역시 개인 고객까지 참여 범위가 확대됐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전력 소매 판매와 송·배전 사업을 사실상 한국전력이 독점하는 구조라 민간 기업이 관련 기술을 상용 서비스로 확대하기 어렵다는게 업계의 지적이다. 한 관계자는 "기술적으로는 이미 구현이 가능하지만 법과 제도적 근거 없이 상용 서비스를 만들기는 어렵다"며 "DR이나 V2G 기술은 대규모 송·배전 설비를 새로 구축하지 않고도 전력망 유연성을 높일 수 있는 선택지인 만큼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