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그룹 회장이 직접 발로 뛴 결과가 배터리 수주로 이어지고 있다. 삼성SDI는 이 회장과 그룹 차원의 전폭적 지원을 바탕으로 전기차 시장 캐즘(Chasm·일시적 수요 둔화)을 이겨내고 배터리 시장에서 생존을 넘어 성장을 이끌어내는데 총력을 다한다는 계획이다.
이 회장의 '배터리 세일즈' 기원은 201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SDI는 당초 글로벌 유력 전장(차량용 전자·전기장비)업체인 독일 보쉬와 합작법인(SB리모티브)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개화하기 시작한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 대응해왔다. 그러다 2012년에 이 합작사를 청산하는 상황에 몰렸다. 십분 활용해온 보쉬의 네트워크를 잃을 수도 있게 되면서 관련 사업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이 전세를 뒤집었다. 같은 해 직접 유럽행 비행기를 타고 BMW를 찾아가 노르베르트 라이트호퍼 당시 회장을 만나며 양사 간 굳건한 파트너십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삼성SDI는 BMW와 대규모 전기차용 배터리 공급 계약을 연달아 체결했다. 현재도 삼성SDI가 BMW와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배경이다.
지난달에도 이 회장은 최주선 삼성SDI 사장과 독일을 찾았다. BMW·폭스바겐 등 기존 납품처뿐만 아니라 메르세데스-벤츠(이하 벤츠)와 같은 신규 고객사를 확보하기 위한 행보였다.이 회장은 이미 지난해 11월 방한한 올라 칼레니우스 벤츠 회장과 만찬을 하고 그 관계를 돈독하게 다져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양사는 20일 수조원 규모의 하이니켈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 계약을 최종 체결했다.
업계에서는 이 회장의 이같은 배터리 세일즈가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눈여겨 보고 있다. 전해액 대신 고체 전해질을 사용해 안정성과 성능을 극대화한게 전고체 배터리다. 삼성SDI는 국내 기업 중 가장 빠른 2027년에 전고체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회사 차원에서도 미래 배터리 시장 선점을 위한 '게임 체인저'로 간주하고 있는 제품이다. 앞서 2023년부터 전고체 파일럿(시험생산) 라인을 구축하고 고객사 샘플 테스트 등을 진행해왔다.
벤츠도 삼성SDI의 전고체 잠재 고객사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파악된다. 이날 안다즈 서울강남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요르그 부르저 벤츠그룹 AG 이사회 멤버 및 세일즈&고객경험 총괄은 삼성SDI의 전고체 도입 여부와 관련한 질문을 받고 "상당히 흥미로운 기술"이라며 "삼성SDI를 비롯한 여러 파트너들과 소통하며 협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이 힘을 실으면서 그룹 내 신성장동력으로 배터리 사업의 위상도 공고해지고 있다. 최근 캐즘이 지속되면서 삼성SDI는 지난해 적자(영업손실 1조7224억원)를 내는 등 실적 부진에 빠져있다. 일단 전기차와 ESS(에너지저장장치)를 앞세워 현 위기를 극복한다는 방침이다. 이번에 벤츠와 체결한 대규모 전기차용 배터리 계약의 경우 최근 ESS 수주에 집중해온 삼성SDI 입장에서 가뭄의 단비 격이다. 유럽 등 해외 공장의 가동률 제고로 이어질 수 있어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ESS용 배터리 수주 역시 현재 진행형이다. 삼성SDI는 지난해말 2조원대의 ESS 납품 계약을 체결한데 이어 지난달에도 1조5000억원 규모의 수주를 올렸다. 특히 시장에서는 거의 유일한 '비중국계 각형 ESS용 배터리' 생산기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진명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IAA(산업가속화법) 등 유럽 정책 기대감과 보조금 등으로 전기차용 배터리 가동률이 회복될 것"이라며 "미국 ESS 시장에서도 추가 수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