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봉쇄 4달, 한국은 멈추지 않았다…"최후의 보루 정유사"

박한나 기자
2026.06.24 05:30

[이란 사태가 남긴 것] ① 초유의 '오일 대란' 속 발휘된 '기업의 힘'

sk 울산콤플렉스 /사진=김휘선 기자 hwijpg@

지난 2월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 호르무즈 해협까지 통제되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전세계 석유제품 공급망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일부 국가들에서는 휘발유·경유 가격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고, 제품 품귀현상도 잇따랐다.

그런데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대한민국은 예외였다. 휘발유·경유 가격이 올랐지만 제한적이었다. 국민들은 평소처럼 차를 몰고 출근을 할 수 있었고, 택배를 전할 수 있었다. 공장도 쉼없이 돌아갔다. 실제 6월 첫째주 국내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2010.4원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23개국 중 세 번째로 저렴했다. 4위 뉴질랜드(2888.7원)와의 격차 역시 컸다.

우선 정부 차원의 신속한 대응이 있었다. 정부는 외교 채널을 총동원해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알제리 등과 추가 물량 확보를 위한 협의에 나섰다. 산업통상부와 해양수산부는 전쟁 이후 유지해온 홍해 항로 운항 자제 기조를 완화해 원유 운반선의 홍해 통항을 허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여기에 최고가격제를 도입해 휘발유·경유 값 상승을 억제했다.

정부의 조치가 실효성을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업의 힘'이 있었다. SK에너지·GS칼텍스·S-OIL·HD현대오일뱅크 4사가 글로벌 5위 수준의 정제능력을 바탕으로 전세계에 네트워크를 보유한 게 주효했다. 미국과 캐나다, 가봉, 콩고, 호주 등 비중동 산유국으로 원유 도입선을 공격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특히 정유사들은 중동산과 아시아 역내 원유에 배럴당 약 20달러 수준의 높은 프리미엄(OSP)이 붙는 상황에서도 물량을 실시간으로 구매했다. 이렇게 긁어모은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경유 등 석유제품을 만들었고, 최고가격제와 수출 제한이라는 정부 방침을 충실하게 따르며 생산 물량을 국내에 우선 공급했다. 원료 수급 차질로 인한 공장 가동 중단을 막았고, 산업 현장의 충격도 최소화했다.

백철우 덕성여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급 부족 우려와 가격 급등이 동시에 나타난 것과 달리 한국은 정부의 충분한 비축유 확보 등으로 수급 불안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했다"며 "정유사들이 비상 대응 체계를 가동해 현물시장과 선물시장에서 비싼 가격을 지불해서라도 물량을 확보하거나 화물을 교체하는 방식까지 동원한 것이 국내 수급 안정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정유사들의 역할은 내수에 그치지 않았다. 지난달 8일 뉴질랜드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적접 SK이노베이션 본사를 찾아 석유제품의 안정적 공급을 요청한 게 대표적인 예다. 미국의 경우 현지 수입 항공유 물량의 70% 이상이 한국산이다. 한국산 항공유의 원활한 공급이 미국의 교통체계 유지에도 기여한 셈이다.

업계에서는 이란 사태를 계기로 한국이 석유제품 시장의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로 부상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스윙 프로듀서'는 사우디아라비아나 미국처럼 원유 시장에서 생산량을 조절해 글로벌 수급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를 의미한다. 업계 관계자는 "비산유국 중 이 정도로 석유제품 시장에 영향을 주는 사례를 찾기 힘들다"며 "정유업계가 국가 경제의 최후의 보루로 제 역할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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