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 현상이 이어지면서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현대차·기아와 일본 완성차 업체 간 가격 경쟁 구도에 환율이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엔화 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제한된 수요를 두고 경쟁하는 국내 완성차 업체와 비교해 일본 완성차 업체의 상대적인 가격 경쟁력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18일 메리츠증권과 업계에 따르면 코로나19로 공급망이 붕괴된 2020~2022년을 제외하면 2008년 이후 현대차·기아의 미국 시장 점유율 증감폭은 원/엔 환율과 대체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것으로 나타났다. 메리츠증권은 원/달러 환율은 달러 매출을 원화로 환산한 '매출 실적'을 좌우하지만 원/엔 환율은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일본차와 맞붙는 상대 가격 경쟁력을 결정해 실질적인 매출에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했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일본에서 생산·조달한 차량과 부품의 달러 환산 원가가 낮아지고 미국에서 번 같은 1달러도 더 많은 엔화로 환산돼 가격 할인과 판촉을 확대할 여력이 커진다.
이달 들어 원/엔 환율은 한때 100엔당 856원까지 하락했다. 엔화 대비 원화 가치가 2008년 금융위기 국면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하면서 원화 강세·엔화 약세 구간에 진입했다. 원화 역시 달러 대비 약세를 보였지만 엔화 가치가 더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일본 완성차 업체의 상대적인 가격 경쟁력이 강화된 셈이다.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는 지난 20년간 토요타·혼다·닛산 등 일본 주요 브랜드와 현대차·기아의 점유율 합산이 40% 안팎을 유지해왔다. 미국 소비자 수요가 한정된 가운데 한일 완성차 업체들이 일정한 고객층을 두고 경쟁해온 구조인 만큼, 환율에 따른 상대 가격 경쟁력 변화가 점유율 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특히 일본 완성차 업체와 대중차 시장에서 맞붙고 있는 현대차·기아로서는 엔저가 장기화할 경우 미국 판매와 수익성 모두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엔저는 일본 업체의 수익성을 높여 미국 시장에서 가격과 판촉을 방어할 수 있는 여력으로 작용한다. 메리츠증권은 엔저가 일본 업체의 '가격 전쟁 실탄'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토요타는 올해 4~6월 환율 변동에 따른 영업이익 증가 효과가 3450억엔에 달했다고 밝혔다. 현재 원/엔 환율로 환산하면 3조원 안팎이다. 토요타가 미국에서 차량 가격을 유지하면서 금융 지원이나 판촉을 확대해도 수익성을 방어할 수 있는 여력이 커졌다는 의미다.
완성차 업체가 환율 효과를 판매 가격에 반영하기까지는 시차가 있다. 환율로 확보한 이익을 즉각 가격 인하에 사용하는 대신 가격을 유지해 수익성을 높인 뒤, 경쟁 상황에 따라 현금 리베이트와 저금리 할부·리스 지원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판매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브리드 라인업과 신차 상품성을 앞세워 일본 업체와 맞붙고 있는 현대차·기아로서는 엔저 장기화가 판매가격뿐 아니라 판촉 경쟁에서도 부담이 될 수 있다. 일본 업체가 환율 이익을 판촉 재원으로 돌렸을 때 가격·인센티브로 맞대응해 점유율을 지킬지, 판촉을 자제해 마진을 사수할지 선택 압박이 커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