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지정경기(地政經技) 격랑 속 한국의 통상정책

구민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2026.02.06 02:05
구민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바야흐로 '자유무역의 이상'이 저물고 '중상주의적 편향'이 국제질서의 전면에 등장했다. 2025년 기준 중국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파상적 관세압박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아시아로 수출노선을 다변화하며 무역흑자 1조2000억달러(약 1740조원)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이 세계의 부를 훔쳐가고 있다"며 중국식 국가 자본주의를 맹비난하고 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 정책기조를 더욱 강하게 몰아붙인다. 얼마 전 한국에 보편관세 25% 인상을 압박한 것 역시 이러한 정책기조의 연장선에 있다.

이 거대한 흐름을 추동하는 3개 기제는 지정학(geopolitics) 지경학(geo-economics) 그리고 기정학(techno-politics)의 삼위일체인 '지정경기'(地政經技)로 규정된다. 지정학이 안보구조를 흔들고 지경학이 부의 흐름을 뒤바꾸며 기정학이 기술주권을 압박하는 전방위적 격랑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첫째, 지정학(地政學)의 귀환이다. 냉전종식 후 '탈지정학'의 달콤함에 젖었던 세계 시장은 미중 패권경쟁과 함께 다시 지정학적 논리에 빠져들고 있다. 특히 인도·태평양 지역은 단순한 해상교통로를 넘어 상대의 물리적 세력권을 억제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투사하려는 첨예한 전략적 요충지가 됐다.

둘째, 지경학(地經學)의 대전환이다. 시장은 이제 지리적 요충지와 동맹의 경계를 따라 분절된다. 수십 년간 세계 경제를 지배한 '효율'과 '비교우위' 중심의 분업체계는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안정성'과 '신뢰'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됐다. 과거 정치적 수사에 머문 리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은 이제 국제무역의 실효적 경로가 됐고 '어디서 누구와 교역하는가'가 시장논리보다 우선하는 시대가 열렸다.

셋째, 기정학(技政學)의 약진이다. 반도체와 AI를 둘러싼 기술 패권경쟁은 단순한 산업적 우위 쟁탈전이 아니다. 기술은 그 자체로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기제이자 국제질서의 향방을 가르는 핵심 전장이다. 이제 패권은 미사일의 수가 아니라 알고리즘에 대한 통제력으로 측정된다.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궁극적으로 세계의 부와 안보를 지배한다'는 명제는 21세기 패권경쟁의 본질을 말해준다.

무역과 안보, 기술의 역학관계가 요동치는 이 변곡점에서 한국의 통상정책은 안타깝게도 '천동설'적 사고에 갇혀 즉흥적 대응에 급급한 모습이다. 패권경쟁의 한복판에서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핑계로 결정을 마냥 유보하는 것은 무모한 도박이다. 국가적 혁신역량을 결집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 정치는 여전히 노란봉투법처럼 기업의 손발을 묶는 아날로그식 진영논리와 첨단 반도체 클러스터마저 지역이기주의의 볼모로 잡는 대중영합주의에 함몰돼 있다.

이제라도 안보동맹의 전략적 가치를 복원하고 지리에 따른 부의 흐름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 동시에 기정학적 위협세력으로부터 국가 핵심 전략산업을 철저히 사수함으로써 이른바 '지정경기' 삼위일체형 복합위기의 파고를 돌파할 국가적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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