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지망하는 청년들은 어떤 정치가를 본받아 정치를 배워야 할 지 망설이게 된다. 어느 나라에나 권력쟁취에 성공한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정치가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의 정치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를 미래의 표상으로 삼아 개혁가의 정신과 의지를 배울 수 있다.
윌버포스는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영국의 정치인, 박애주의자로 노예무역 금지법안을 통과시켰고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사회개혁가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라고 소개된다.
케빈 벨몬트의 '윌리엄 윌버포스: 인류의 영웅(A Hero for Humanity)'의 서문을 쓴 찰스 콜슨은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만일 윌리엄 윌버포스가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그 생활에 만족하고 지냈다면 그는 쉽게 영국의 수상, 그 시대 가장 힘 있는 정치지도자가 됐을 것이다."
윌버포스는 영국 수상의 자리와 권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개혁가로서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1759년 8월 24일 영국 요크셔의 킹스턴 어폰 헐에서 부유한 가문의 독자로 출생했다. 9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지만 케임브리지 대학의 세인트존스 칼레지에 입학한 17세에 할아버지와 숙부의 별세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다. 그는 뛰어난 웅변술과 그리스 고전에 해박한 학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아테네의 솔론의 개혁을 특히 열심히 공부했으며 1781년 케임브리지에서 학사를, 1788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에서 평생의 친구인 윌리엄 피트를 만났다. 피트의 권유로 정계로 진출, 1780년 21살 학생 신분으로 고향 킹스톤 어폰 헐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토리당이나 휘그당에 가입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바른 정치에만 매진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신사다운 정치가'라는 평을 얻었다.
1784년 요크셔주 하원의원으로 재선한 후 다음해인 1785년 여름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퀸즈 칼레지의 철학 교수 아이삭 밀너와 떠난 유럽 대륙 여행에서 그는 일대 결단을 내리게 됐다.
그와 밀너는 18세기 영국의 비국교도인 필립 도드리지의 '영혼에서 종교의 등장(The Rise and Progress of Religion in the Soul)'을 함께 읽고 복음주의 기독교도의 참 모습을 실천화하는 일상에 대해 깊이 토론했다.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철저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 변모했다. 기독교인이야말로 이웃을 위해 앞장서서 헌신해야하고 겸손과 청빈의 일상을 살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여행 중에도 새벽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했으며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는 성찰의 시간도 가졌다. 정치 활동에 회의가 들 때마다 런던 시티의 성 메리 울노드 교구 목사 존 뉴턴으로부터 마음의 힘을 얻었다.
그는 기독교적 영성과 윤리적 가치를 현실 정치에 접목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영국 사회의 개혁을 위해 극복 방안을 모색하고 이를 법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하원의 개혁법안, 선거제도 개편안, 영국에 새 기풍을 진작하기 위해 절도자, 성범죄자, 방화범의 사례를 분석해서 억울하게 누명 쓴 사람을 석방 또는 감형시켜줄 수 있는 법안 등을 제안했다. 여성 범죄자의 감형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활동은 토리당의 보수주의자들로부터 급진적이라고 비판받았다. 이로 인해 그가 제안한 법안은 하원에서 통과됐지만 상원에서는 부결됐다.
윌버포스가 특히 관심을 기울인 법안은 노예제도 폐지 법안이었다. 그는 존 뉴턴의 영향으로 흑인 노예제도가 반 기독교적이며 영국사회를 천박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여겼다. 16세기 영국은 노예무역의 종주국이었으며 영국이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80%가 노예 산업으로 얻어졌다. 한 통계에 따르면 영국 상선에 의해서 1100만명의 아프리카 사람이 노예로 팔려갔고 그 중 140만명은 수송 중에 죽었다.
윌버포스는 한때 노예무역선에서 의사로 일했던 제임스 람제이 목사로부터 노예무역의 비참함을 전해들었다. 람제이 목사는 1781년에 켄트주 테스톤에서 찰스 미들턴, 토마스 클락슨, 한나 모아등과 노예무역 금지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들을 테스토니트스(Testonites)라고 불렀다. 이들 중 토마스 클락슨은 세인트 존스 칼리지 시절 친구로 50여 년간 서로 협력하는 동지가 됐다.
윌버포스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은 링컨셔 지주인 베네트 랑톤이었다. 그는 자기 집에서 노예제 반대자의 만찬모임을 열었고 이 모임에서 윌버포스에게 노예제 폐지운동의 기수가 돼주기를 간청했다.
윌버포스는 선뜻 앞장서지 못했다. 윌버포스의 친구인 피트 수상도 강하게 반대했다. 피트는 이 일을 맡으면 많은 희생이 따를 것이고 현실적으로도 의회에서 이 법이 제정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윌버포스에게 손을 뗄 것을권유했다.
윌버포스는 며칠 동안 기도하며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했다. 마침내 노예제 폐지운동이 기독교 신앙의 원칙과 합당한 실천임을 확신했다. 그는 노예 무역상들과 노예소유주의 계속적인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고 이 일을 추진하기로 하나님께 기도로 맹세했다.
1791년에 윌버포스는 '노예무역금지법 제정을 위한 모임'을 이끌며 지방 지부를 조직했고 각종 책자와 강연회, 실태조사 등으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전 국민에게 알리는데 앞장섰다.
그는 마침내 1791년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하원에 제출했지만 결과는 163대88로 참패였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예무역제도를 옹호하는 여론이 주도적이었으며 옹호론자들은 노예제도가 아프리카를 문명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면서 윌버포스를 공격했다.
그 사이에 노예무역을 점진적으로 폐지하자는 절충안이 제안돼 230대 85로 통과됐다 그러나 이는 전면적인 폐지를 무한정 유예시키려는 의도가 들어 있을 뿐 별로 만족할만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윌버포스는 여기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1792년에 다시 노예무역금지 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이 때는 피트와 찰스 제임스 폭스도 의회에서 지지 발언을 해 줬다.
1793년 2월 윌버포스가 의회에 제안했던 노예무역금지법은 8표의 차이로 부결됐다. 당시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국론분열의 가능성이 높다는 여론이 주류를 이뤘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윌버포스는 그의 친한 친구인 피트 수상과의 우정도 한때 무너지는 아픔을 겪어야했다. 윌버포스를 지지한 많은 사람들도 지쳐 있었으며 가까운 동지들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윌버포스는 1790년대에도 이 법안을 계속 제출했고 통과를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