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7일은 세계 정치사에 길이 남을 날이다. 프랑스 중도 신당 '라 레퓌블리크 앙마르슈'(전진하는 공화국)의 에마뉘엘 마크롱이 대통령에 당선된 날이어서다.
거대 양당이 아닌 제3지대 중도 정당은 대통령을 배출하기 어렵다는 게 정치권의 속설이었다. 그 어려운 걸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마크롱이 해냈다. 물론 그럴만한 사정이 있긴 했다. 극우 성향의 국민전선(Front National)의 마린 르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중도 표심을 결집시켰다.
이때까지 비주류 정당이던 앙마르슈는 마크롱의 대통령 취임 이후 일약 집권여당으로 군림했다. 다음 총선에 앙마르슈는 하원 의석의 60% 이상을 휩쓸며 압승을 거뒀다. 프랑스에서 2000년대 이후 이어진 사회당과 대중운동연합의 거대 양당 체제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제3지대' 중도 정당 출신의 대통령.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 성향의 정당이 주요 정당으로 자리잡고, 이 정당이 배출한 대통령이 나라를 이끄는 것이 과연 한국에선 가능할까.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거대양당 체제 아래에서 이게 가능하려면 중도 성향의 주요 정당이 출현해 다당제가 구축되고, 이 중도 정당 중심으로 대선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는 게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 즉, 집권시 연립정부가 구성돼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선 연립정부 구성이 의회내각제 국가만큼 쉽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물론 불가능하진 않다. 과거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이 대표적이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머니투데이 the300(더300)과의 통화에서 "대통령제라고 해서 또는 의원내각제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면서 "물론 의원내각제가 되고 (선거제도를) 비례로 하면 제3·4당이 더 많아지겠지만, 대통령제라고 다당제가 안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해외 사례를 보면 대통령제 아래에서도 다당제로 의회가 운영되고 연립정부가 구성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20년 발간한 '대통령제 정부의 초당적 내각 구성 사례와 시사점' 보고서에 인용된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96년부터 2009년까지를 기준으로 전체 대통령제 국가 가운데 64.3%에서 대통령 소속 집권당이 의회 소수파였고, 이 가운데 56.6%가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허석재 입법조사관은 보고서에서 "행정부·내각의 구성 및 운영에 있어서 의회의 지지가 요구될수록 대통령은 집권당을 통해 의회에서 다수파를 구축해야 한다"며 "대통령의 권력자원이 많고 권한 범위가 클수록 원내 정당으로서는 정부에 참여해 자원을 배분받고자 하고, 정치인은 각료로 경력을 쌓고자 할 유인이 커진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제3지대 정당의 성공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제3지대가 기반을 갖추기 어려운 최대 원인으로 현행 선거제도를 꼽았다. 한국은 전체 의석의 80% 이상을 소선거구 단순다수제로 뽑는다. 소선거구 단순다수제는 하나의 지역구에서 단 1인만이 공직을 차지할 수 있는 탓에 거대 양당의 형성을 유도한다. 유권자 입장에서는 'A 아니면 B'라는 선택을 강요받는 셈이다.
대통령제 아래 다당제를 안정적으로 구축된 국가를 보면 대다수가 비례명부제를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남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구현했다고 평가받는 칠레다. 칠레는 정당명부제를 쓰면서도 선거구당 2개 의석을 배정하는 2석비례제라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특정 정당이 2개 의석을 모두 가져가려면 2등을 한 정당보다 2배 이상의 득표를 해야 하는 셈이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같은 소선거구 기반의 선거제도 아래에선 제3당이 버텨낼 재간이 없다"며 "비례적인 방식을 획기적으로 도입하지 않는 이상 쉽지 않을 것이다. 선거 제도가 비례적으로 되면 제3지대에서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는 믿음이 (유권자에게) 생기고, 제3지대가 세력화하는 데 훨씬 유리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나라 대비 교섭단체 진입 장벽이 높다거나 정당 기율이 강한 점도 다당제가 형성되기 어려운 요건으로 언급된다.
한국은 전체 300석 중 20석, 6.6%가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이다. 반면 대표적 다당제 국가인 독일의 경우 하원에서 총의석수의 5% 이상이 되면 교섭단체를 구성한다. 현재 630석에선 32석부터다. 의석수로는 우리보다 기준이 높지만, 총원 대비 비율로는 낮다.
옆나라 일본은 교섭단체 대신 의원 2인이면 구성할 수 있는 '회파'가 있다. 위원회 위원 배정, 질의시간 등을 배분할 때 각 회파의 의원 숫자로 기준을 삼는다는 점에서 교섭단체와 개념이 유사하다. 캐나다 하원은 338석의 3.5%인 12석으로, 원내 5개 정당 중 3개가 교섭단체로 인정된다.
정당의 기율이 높고 의원 자율성이 낮은 점도 정당 간 협력, 다당제 정착을 막는 요소로 거론된다. 소수정당 한 인사는 "높은 정당 기율은 양당제를 더 고착화한다"며 "유권자들이 선거에서 다른 정당에 비례대표를 주겠다는 생각은 해도 지역구 표를 주겠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의석을 확보해도 어느 정당의 2중대냐는 소리부터 나오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결선투표제와 같은 다당제를 유도할 만한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결선투표제는 1차 투표 결과 과반에 이르는 후보자가 없으면 투표 대상을 좁혀 다시 투표하는 방식을 말한다. 프랑스 의회·지방선거, 영국 런던시장 선거 등이 대표 사례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도 상원의원, 주지사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결선 투표제는 군소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사전에 당선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어 표 결집을 용이하게 한다. 결선 선거를 앞두고 전개되는 거대정당과 군소정당의 협상 과정에서 군소정당 지지자들의 요구가 거대정당의 선거 공략에 반영될 여지도 생긴다. 허석재 입법조사관은 "결선투표제가 활용될 경우 당선가능성이 낮은 후보도 지지세를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