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피지컬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를 축으로 한 1000조원 이상의 역대급 지역 투자 계획이 29일 나온다. 이재명 정부가 역점을 둔 사업이자 국토 균형발전에 방점이 찍힌 투자 청사진이다. 그러나 공식 발표 전부터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둘러싸고 '호남 편중 지원'과 '기업 자율성 침해' 등 여러 논란이 불거지면서, 국가의 미래 대계 논의가 갈등의 늪에 빠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청와대와 업계 등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은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주재한다. 이 자리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비롯한 국내 주요 기업의 CEO(최고경영자) 등이 참석한다. 당초 민간에서는 전문경영인 위주로 행사 참석이 준비됐지만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해 총수들도 함께 하기로 했다.
3대 메가프로젝트는 △반도체와 △피지컬AI △AI데이터센터 등이다. 광주·전남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공정(웨이퍼를 투입해 칩을 만드는 핵심 공정) 팹(공장)을 포함한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투자를 하고 충청·강원권에 데이터센터, 영남권에 피지컬AI 투자가 각각 중점적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지역별 투자 계획이 잇따라 발표될 예정이지만 유독 시선은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설 호남에 쏠렸다. 팹(반도체 공장) 한 기 건설에 60조원 이상 들어가 총 사업 규모만 수 백 조원에 달할 것이란 추산이 나온 만큼, 이번 투자는 호남권이 완전히 탈바꿈할 수 있는 계기로 여겨졌다. 야권에서는 용수 부족 우려 등을 들어 이번 부지 선정이 정치적 외압에 해당한다며 맹공을 펼쳤고 여권은 AI 전환기에 맞춘 국가 대계에 합리적 대안도 없이 발목잡기를 한다고 맞섰다.
여야 논쟁이 격화된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은 야당 비판에 대해 직접 반박에 나섰다. 이 대통령은 지난 27일 자신의 X(엑스·옛 트위터)에 "이 일은 정확히 말하면 정부의 용수, 전력, 용지, 인프라, 인력양성, 정주여건 구축 등 기업환경 조성과 공직자들의 설득·요청에 따라 CEO들이 회사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해 결단한 것"이라며 "대한민국 생존전략이 된 국가균형발전이라는 행정 목표 달성을 위해 공직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한 결과이고 전무후무한 초대규모 지역투자 유치라는 역사적 성과는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했다.
-광주·전남 전공정 팹 유력 검토…정부 국토균형발전 발맞춰 첨단산업 투자 확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이 호남권 신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포함해 1000조원대 AI(인공지능) 산업 투자에 나선다. 정부의 국토균형발전 정책에 발맞춰 첨단 생산시설을 수도권 밖으로 확대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 AI 시대에 급증하는 반도체, 데이터센터, 로보틱스, 전력 인프라 수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이기도 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9일 청와대에서 진행되는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통해 이같은 계획을 밝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광주·전남에 전공정(웨이퍼를 투입해 칩을 생산하는 핵심 공정) 팹(Fab, 공장)을 포함한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경기 평택·화성·기흥과 충남 아산·천안에 메모리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첨단 패키징 생산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첨단 패키징 핵심 거점인 아산캠퍼스 확장 가능성도 거론된다. SK하이닉스는 경기 이천과 충북 청주에서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생산시설을 운영 중이다. 양사는 경기 용인에도 메가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있다.
AI 시대 반도체 패권 경쟁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생산거점을 선제적으로 확대하려는 전략적 판단으로 풀이된다. AI 데이터센터와 자율주행차,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등으로 반도체 수요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반도체가 핵심 전략자산으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달 대만 '컴퓨텍스 2026'에서 "반도체 웨이퍼 공급 부족 현상이 2030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양사의 투자는 '호남'과 '반도체'라는 키워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회장과 최 회장은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AI 인프라 분야에 대한 대규모 투자 역시 언급할 게 유력하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충남 아산·천안을 중심으로 OLED(유기발광다이오드)와 차세대 디스플레이 생산을 위해 향후 10년간 100조원 규모의 투자를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기는 부산사업장을 중심으로 MLCC(적층세라믹콘덴서)와 반도체 기판 생산능력 확대를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SDI는 차세대 모빌리티와 피지컬 AI에 대응하기 위해 관련 배터리 생산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SK그룹의 경우 아마존웹서비스(AWS)와 손을 잡고 울산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진행하고 있다.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 SK가스 등의 전력·통신 역량을 결집한 AI 전용 연산시설 확보 프로젝트다. 오픈AI와는 서남권 지역 AI 데이터센터 설립을 추진하고 있고, 엔비디아와는 AI 팩토리 구축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연일 '한국형 AI 풀스택' 구축을 독려하고 있는 최 회장이 전국 단위의 AI 데이터센터 및 에너지 인프라 투자 구상을 발표할 수도 있다.
최신 반도체 팹 1기 건설에 최소 60조원 이상이 투입되는 점을 감안하면 호남권 투자 규모만 700조원 안팎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여기에 기가와트(GW)급 초대형 AI 데이터센터 건설 비용까지 포함하면 전체 투자 규모는 10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시장 일각에선 전체 투자 규모가 2000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볼 정도다. 윤석열 정부 당시 주요 그룹들이 5년간 약 1000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한 사례는 있었지만 특정 권역에 1000조원 이상을 투자하는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피지컬 AI와 데이터센터 분야에서는 현대차그룹과 LG그룹의 투자 검토에 속도가 붙을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전북 새만금 34만평 부지에 올해부터 9조원 규모의 투자를 순차적으로 시행할 예정이다. AI 데이터센터 중심의 로봇 클러스터를 조성한다는 구상이다. LG그룹은 영남권의 계열사 인프라를 결집해 피지컬 AI 등 관련 투자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 정부가 집권 초기부터 추진해온 국토균형발전 전략과 맞닿아 있는 투자 계획이다. 수도권 집중도를 낮추면서 전 국토를 활용해 산업의 AI 대전환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해석된다. "수도권에는 더이상 공장을 지을 땅이 없다"는 게 청와대의 인식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5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수도권 일극체제 극복을 위해서는 획기적인 전략산업 다극화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호남 지역 시설 투자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 등 정부가 이례적으로 전면에 나서 강한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정치적 부담에도 청와대가 목소리를 높이는 배경에는 전 세계적으로 거세지고 있는 국가 주도 산업정책의 흐름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최근 주요국들은 보호무역과 기술 패권 경쟁에 대응하기 위해 반도체 등 전략산업에 대한 국가 개입을 강화하고 있다.
산업정책은 정부가 주도해 특정 산업을 지원하는 정책이다. 1995년 WTO(세계무역기구) 출범 등과 맞물려 주류에서 밀려난 산업정책은 통상 질서의 변화 속에서 부활했다.
IMF(국제통화기금)에 따르면, 2023년 전 세계적으로 2500건 이상의 산업정책이 등장했다. 글로벌 산업정책에서 미국, 중국, 유럽연합(EU)이 차지한 비중은 48%였다. 반면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등장한 산업정책은 연평균 250건 정도에 불과했다.
산업정책의 부활은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미국은 2022년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제정하며 대규모 보조금을 투입했다. 반도체를 국가 안보와 경제 안보의 핵심 자산으로 규정한 데 따른 결정이다.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호남행(行)이 기업의 결정이라며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향후 반도체 공급망 안정성, 전력 확보, 재난 대응 능력, 국가 균형발전, 인재 확보 등 향후 정부 정책과 맞물린다면 산업정책의 영역으로도 연결될 수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페이스북에 "이번 결정은 대한민국 반도체 경쟁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투자이자,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를 줄이고 산업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서남권의 새로운 성장 기반을 만드는 국가적 프로젝트"라고 말했다.
해외에서도 전략산업의 생산 거점을 재배치하려는 움직임은 뚜렷해지고 있다. 미국은 애리조나와 오하이오 등에 대규모 반도체 생산시설을 유치하고 있다. 일본은 홋카이도, 구마모토 등으로 반도체 생산기지를 분산하고 있다.
결국 산업정책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번 결정은 국가 경쟁력을 어떻게 공간적으로 재배치할 것이냐는 관점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호남이 내포한 정치적 상징성과 이해관계 등에 따라 이번 결정을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해외에서도 산업 공간의 재편 과정에서 비슷한 분석과 논란이 제기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28일 X(엑스)에 "호남에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은 특정 지역에 대한 특혜가 아니다"라며 "정부의 대대적 지원 속에 관련 기업의 결단으로 가장 합리적인 반도체 산업 중심지를 추가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투자 판단에 정책 입김 확대 논란…용인·호남 대규모 투자 동시 추진에 투자 효율성 우려도
국내 주요 그룹의 호남·충청권 대규모 투자 계획을 두고 재계의 우려도 적지 않다. 기업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1000조원 이상의 투자 결정이 기업의 전략적 판단보다 정부의 정책적 의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부담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경기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구축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호남권 투자까지 추진될 경우 투자 우선순위가 흔들리고 사업 추진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삼성전자 용인 국가산업단지의 토지 보상률은 지난 3월 기준 43%에 머물렀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호남권 반도체 투자 유치를 본격화한 올해 초 이후 용인 산단의 전력·용수 공급 등 핵심 인프라 구축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반도체 팹(공장) 운영에 필수적인 전력과 용수 공급 체계, 전문 인력 확보도 과제로 꼽힌다. 호남권은 태양광을 비롯한 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하지만 기상 여건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은 변수다. 24시간 가동되는 반도체 공장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인 만큼 순간적인 전력 차질만으로도 대규모 생산 불량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이미 수도권에 형성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생태계를 호남권에 새롭게 구축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소부장 기업과 협력업체를 유치하고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데만 수년이 걸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지역의 고교, 대학 등과 체계적인 산학협력체계를 만들어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중소, 중견 협력업체들은 인력난에 직면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