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 벗고 다른 사람 돕는다"…아이 죽음 뒤, 원인 찾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네덜란드)=이현수 기자
2026.07.08 05:15

[기획]클린 스쿨-자살 없는 학교⑤-1 '자살 청소년 심리부검' 9년째…자살률 우리나라 절반 이하

[편집자주] 머니투데이는 올해 마약, 도박, 자살 등이 없는 맑은 학교 만들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한국의 자살 사망률은 전세계적으로 높습니다. 청소년 자살 사망률도 최근 높아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우울 증상을 호소해도 '사춘기'로 치부되면서 말할 곳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어떤 위기를 겪고 있는지 위기에서 구할 방법은 없는지 알아봤습니다.
(왼쪽부터)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13 자살예방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국가 자살예방 계획 책임자 에블린 반 호르(Evelien van Goor), 공공정책팀 페마 파이스(Femma Pais), 선임연구원 사스키아 메렐(Saskia Mérelle), 연구원 엘리아스 발트(Elias Balt).

"유가족들은 자녀의 자살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자책에서 벗어나기도 합니다. '우린 늦었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네덜란드 '113 자살예방센터'(113 Zelfmoordpreventie)에서 만난 엘리아스 발트 박사는 심리부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자녀의 죽음을 둘러싼 질문과 죄책감을 유족의 몫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또 다른 청소년의 죽음을 막기 위한 단서를 함께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얘기다.

심리부검은 자살로 사망한 사람을 잘 알았던 유족과 친구 등을 심층 면담해 자살에 이르게 된 과정을 재구성하는 조사 기법이다. 네덜란드는 청소년 심리부검을 국가 차원에서 수행하는 유일한 국가로 꼽힌다.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인 113은 최근 5년간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청소년 자살 301건 중 28%에 대한 심리부검을 완료했다.

발트 박사는 "유년 시절 트라우마, 성과에 대한 압박이나 완벽주의, SNS(소셜미디어)를 통한 자살 모방 행위 등 청소년 자살의 주요 원인을 심리부검을 통해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네덜란드는 청소년 자살률이 급상승하자 발 빠르게 대응에 나섰다. 2017년 네덜란드 청소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4명으로 전년도 2.6명보다 크게 높아졌다. 이에 네덜란드 보건복지부는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를 지시했고, 113은 2018년부터 청소년 심리부검을 실시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심리부검 사업은 국가 자살예방 5개년 계획의 하나로 운영된다. 정부는 계획 수행을 위해 113에 5년마다 약 25만 유로(약 4억3800만원)를 지원한다. 심리부검 연구는 113 소속 연구원 4명과 인터뷰어 6명이 수행한다. 심리부검 사업은 성과를 냈다. 최근 5년(2020~2024년) 네덜란드 청소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3.06명으로 낮아졌다. 우리나라 7.34명의 절반 이하 수준이다.

113 자살예방센터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회의를 하는 풍경./사진=이현수 기자.

연구진은 심리부검이 유가족 지원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발트 박사는 "유족들은 자녀의 자살 이후 수많은 질문과 죄책감을 끌어안고 살아간다"며 "퍼즐 조각 맞추듯 사건을 재구성하며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기도 한다"고 말했다.

부모뿐 아니라 친구, 교사 등 고인과 관계를 맺었던 16세 이상이면 누구나 심리부검에 참여할 수 있다. 발트 박사는 "사람마다 기억하는 모습이 달라 여러 면담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던 생활이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며 "연구 결과가 특정 집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지역과 교육 수준, 성별 등을 고려해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랜 경험으로 과정은 체계화했다. 신청자는 온라인 설문조사에 응답한 뒤 조건에 부합하면 심층 면담에 참여하게 된다. 설문 결과 신청자의 정신건강 상태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면담을 미루거나 전문가에게 연계한다. 연구진은 면담 전후로 수차례 통화나 온라인 미팅을 통해 참가자의 상태를 확인한다.

심리부검 결과는 자살 예방 정책에 활용된다. 연구진은 매년 정책보고서를 발간하고, 전문가 자문단의 검토를 거쳐 보건의료·교육 등 분야 정책을 폭넓게 제안한다. 최근에는 심리부검 연구로 생전 질병을 앓았던 자살 청소년 중 44%가 자폐스펙트럼장애(ASD)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자폐 청소년 대상 정신건강 지원 확대가 주요 정책 과제로 제시됐다.

사스키아 메렐 113 선임연구원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젊은 세대의 자살률이 증가하는 추세"라며 "자살은 정신 건강과 사회적 관계, 환경 등 복합적 요인에서 발생하는 만큼 청소년들의 실제 경험을 반영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청소년 심리부검(psychosocial autopsy), 어떻게 이뤄지나/그래픽=이지혜 디자인기자.

자살 예방 유일 콜센터도 운영…"경청 통해 당장 행동 멈춘다"
113 콜센터 책임자 마리케 헤르딩크(Maryke Geerdink)가 상담 부스에서 전화 상담을 하는 모습. 각 부스에는 상담사들이 편안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소파와 짐볼 등이 놓여있다.

113은 네덜란드 유일의 자살 예방 상담 콜센터도 운영 중이다. 하루 평균 700건의 전화·채팅 상담이 접수되는 이곳엔 약 120명의 상담사가 주 24~36시간씩 교대로 근무한다.

콜센터의 목표는 자살 충동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 위기의 순간을 넘기도록 돕는 것이다. 콜센터 책임자 마리케 헤르딩크는 "잠깐의 상담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순 없다"면서도 "경청을 통해 당장의 행동을 멈추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다"고 했다.

상담사들의 정신 건강도 관리 대상이다. 상담사들은 매일 출·퇴근 때 담당 매니저와 자신의 상태를 공유한다. 업무뿐 아니라 감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개인사도 함께 나눈다. 헤르딩크는 "매니저들은 상담사의 당일 상태에 따라 업무를 조정하고 필요시엔 전문의와 상담하도록 한다"며 "상담사들이 심리적 안정을 느끼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머니투데이·안실련 공동기획

113 자살예방센터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게임을 하며 휴식하는 모습./사진=이현수 기자.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