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용(가명)씨는 아내와 함께 두 딸을 키웠다. 큰딸은 결혼한 뒤에도 부모와 가까이 살고 있고 둘째 딸은 캐나다에 정착했다. 멀리 살지만 자매는 자주 연락하며 부모님의 안부도 잘 챙겼다.
몇 해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김씨는 혼자 살고 있다. 매달 받는 연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어 자녀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할 일은 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독감이 폐렴으로 번져 입원했고 퇴원 후에는 집 앞에서 크게 넘어지기도 했다. 병문안을 온 큰딸에게 김씨는 혹시 치매가 오거나 거동이 불편해지면 어떻게 지내야 할지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큰딸은 자신이 돌보겠다고 했지만 김씨는 딸에게도 꾸려야 할 가정과 생활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치매가 오면 내 재산은 누가 관리할까…건강할 때 준비해야
김씨의 재산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와 현금 3억원 그리고 매달 나오는 연금이었다. 혼자 생활할 돈은 마련해 뒀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금융거래를 하기조차 어려워졌을 때 그 돈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이런 준비는 판단력이 온전할 때만 할 수 있다. 치매 등으로 의사능력이 떨어진 뒤에는 신탁계약을 새로 맺기 어렵다. 그때가 되면 가정법원에 성년후견을 청구해 후견인이 재산을 관리하게 된다. 후견은 본인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지만 절차에 시간이 걸리고 누구를 후견인으로 세울지는 법원이 정한다. 살던 집을 팔 때에도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반면 신탁은 본인이 건강할 때 누가, 어떤 기준으로, 무엇에 돈을 쓸지를 직접 정해 둘 수 있다.
김씨는 큰딸과 의논해 아파트와 현금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신탁하기로 했다. 가족의 뜻이 지금은 동일하더라도 재산을 관리하고 상속하는 기준은 미리 정해 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두 딸도 서로를 믿고 필요한 결정을 무리 없이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파트는 큰딸을 수탁자로 하는 민사신탁으로 진행했다. 신탁등기를 하면 등기부상 소유 명의는 큰딸로 바뀌지만 신탁의 이익을 누리는 수익자는 김씨 자신이어서 지금처럼 그 집에 계속 살 수 있다. 치매 등으로 혼자 생활하기 어려워지면 큰딸이 아파트를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처분 여부는 큰딸의 생각만으로 정하지 않고 의사의 진단 등 객관적인 상황을 고려해 결정하도록 했다.
김씨는 큰딸이 캐나다에 있는 동생과 잘 소통하더라도 집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괜한 오해를 받지 않을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처분대금은 금융기관에 설정한 금전신탁으로 옮겨 자신의 돌봄 비용으로만 쓰도록 했다.
현금은 금융기관을 수탁자로 하는 신탁에 맡겼다. 신탁에서는 김씨의 생활비와 병원비, 간병비를 필요에 따라 지급한다. 큰딸은 아버지의 건강과 생활을 살피고 필요한 지출을 금융기관에 청구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씨는 딸의 수고에 고마움을 전하고자 매월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내용도 계약에 담았다. 돌봄을 위해 큰 돈을 써야 할 때에는 영수증 등 증빙을 남겨 비용을 투명하게 관리하면 딸들도 마음이 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큰딸은 캐나다에 있는 동생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눴다. 집을 처분해야 할 상황부터 돌봄 비용의 지급 방식까지 상의했다. 가까이 사는 큰딸이 실무를 맡되 중요한 일은 동생과 의논하기로 했다. 둘째 딸도 멀리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 돕겠다고 했다. 아버지를 위한 일인 만큼 서로에게 부담을 떠넘기지 말자는 마음은 같았다.
김 씨는 사망 후 남은 신탁재산을 큰딸에게 70%, 둘째 딸에게 30% 남기기로 했다. 평소 돌봄을 맡아온 데다 사후 상속 관련 일까지 큰딸이 처리해야 한다는 점을 배려했다. 둘째 딸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 큰딸도 동생과 충분히 의논한 뒤 뜻을 받아들였다. 이 내용 역시 신탁계약에 담았다. 법정상속분대로라면 두 딸은 절반씩 받고 둘째 딸의 유류분은 그 절반인 25%다. 30%는 이를 넘는 비율이어서 아버지의 배려가 훗날 법적 다툼으로 번질 여지도 줄여 둔 셈이다.
신탁과 함께 챙겨 둘 것들
신탁은 재산을 관리하는 장치다. 입원이나 요양시설 입소, 치료 방법 선택처럼 몸과 생활에 관한 결정까지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이런 부분이 걱정된다면 건강할 때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후견계약(임의후견)을 맺어 두는 방법이 있다. 법원이 후견인을 정하는 대신 본인이 고른 사람이 정해 둔 범위에서 돕게 되므로, 신탁과 함께 준비하면 재산과 생활 양쪽을 빈틈없이 대비할 수 있다.
가족이 수탁자를 맡을 때에는 견제 장치도 미리 정해 두는 것이 좋다. 처분이나 큰 지출의 기준을 계약에 구체적으로 적고, 신탁 운영 상황을 다른 가족에게 정기적으로 알리도록 하면 멀리 사는 자녀도 안심할 수 있다. 계약을 맺은 뒤에도 건강이나 가족 사정이 달라지면 내용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김 씨 가족이 준비한 것은 단지 재산을 맡기는 방법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뜻을 전했고, 두 딸은 각자의 형편을 헤아리며 역할을 나눴다. 건강할 때 나눈 대화가 앞으로의 돌봄을 준비하는 출발점이 됐다.
배정식 수석전문위원은 화우 자산관리센터에서 상속·신탁·기업승계 등 패밀리오피스 컨설팅과 유산정리 등의 자문을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