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비 하면 연·고대에 갈 수 있어요. 저도 처음엔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김정민(43) 배재중 럭비부 감독은 자신이 타원형 공을 처음 잡았던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체격이 좋고 운동신경이 뛰어났던 그에게 지역 장학사가 럭비를 권했다. 부모님의 마음을 움직인 말은 더욱더 현실적이었다. 럭비를 잘하면 연세대나 고려대에도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한국 럭비에서 '진학'은 무시할 수 없는 입문 동기다. 현재 국내에서 럭비부를 운영하는 주요 대학은 고려대와 연세대, 경희대, 단국대 정도다. 김 감독은 지난달 '제3회 OK 읏맨 럭비 아카데미'에서 스타뉴스와 만나 "럭비 시장 자체는 작지만 하는 인원도 적기 때문에 다른 종목과 비교하면 진학률은 좋은 편"이라며 "배재중에서도 학부모님들은 진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처음에는 럭비 자체보다 배재고에 갈 수 있는지, 이후 대학 진학에는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먼저 보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대학교에 가면 럭비는 그만둬도 되나요?"라고 묻는 학부모도 있다. 시쳇말로 조금은 '웃픈(겉으로는 웃는데 속으로는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김 감독은 그것마저 잘못된 출발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럭비가 하고 싶다'며 먼저 찾아오는 중학생은 1년에 한두 명 정도에 불과하다는 게 김 감독의 설명이다. 그만큼 한국에서 럭비와 처음 만나는 길은 여전히 좁다.
김 감독은 "그때 가서 결정하시라고 한다. 지금 열심히 해서 더 좋은 곳에 가게 되면 그때는 더 욕심이 생기고, 계속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고 웃었다.
중요한 건 '왜 시작했느냐'보다 시작한 뒤 럭비 자체의 재미를 발견하느냐다. 올해 초까지 연세대 코치로 일한 김 감독은 그 반대의 경우도 적지 않게 봤다. 대학에 진학한 뒤 "저는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선수들이 있었다. 연고전을 준비하며 훈련 강도를 높이려 해도 "어차피 저는 그만둘 건데요"라는 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실업팀 진출 가능성을 이야기해도 다른 진로가 있다며 미련 없이 공을 놓는 선수도 있었다.
선택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흐름이 반복될 정도로 한국 럭비의 선수층이 얇다는 데 있다. 세계적으로 보면 럭비는 낯선 스포츠가 아니다. 종주국 잉글랜드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와 유럽, 일본 등에서는 두꺼운 선수층과 팬 문화를 갖춘 인기 종목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여전히 럭비공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채 학창 시절을 보내는 사람이 훨씬 많다. 엘리트 선수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앞서, 럭비를 처음 접할 기회를 어떻게 늘릴 것인가가 중요한 이유다.
결국 답은 두 가지다. 이미 들어온 아이에게 럭비의 재미를 알려주고, 동시에 럭비로 들어오는 입구 자체를 넓혀야 한다. 김 감독은 "지금은 실업팀에서 뽑아갈 선수들이 없다. 고등학교 졸업 선수들까지 접촉해서 데려가는 현실"이라며 "진학을 목적으로 시작해서 하고 싶지 않은데 대학까지 오고, 어쩌다 실업팀까지 가는 선수들이 생기면 열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대한체육회 럭비 상임 심판인 서인수 심판은 그 입구 중 하나로 '태그 럭비'를 꼽았다. 럭비는 처음 접하기 쉬운 종목이 아니다. 서 심판은 "한 번쯤 공을 만져보고 필드에서 해봐야 이해할 수 있다"며 "학교 현장에서는 인원이 부족하다 보니 아이가 들어오자마자 경기에 투입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강한 태클과 몸싸움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 태그 럭비는 이런 진입장벽을 크게 낮춘다. 태클 대신 허리에 매단 태그를 떼는 방식으로 신체 접촉 부담을 줄여 누구나 럭비의 패스와 공간 활용, 협동의 재미를 경험할 수 있다.
학교 수업에서 득점한 뒤 팀원 모두가 하이파이브를 해야 '트라이'를 인정하는 규칙을 활용하기도 한다. 운동을 잘하는 개인이 혼자 해결하는 대신 모두가 과정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서 심판은 럭비의 득점 명칭인 '트라이' 역시 혼자가 아닌 팀 전체가 함께 노력하고 시도해 만들어낸 결과라는 식으로 교육적 의미를 전달한다
서 심판은 "나는 못 한다고 빠질 수가 없다. '다 같이 해보자', '잘했어'라고 하게 된다"며 "학교 선생님들이 이런 모습을 정말 좋아한다. 단순히 게임만 하는 게 아니라 협동이라는 교육적인 내용을 넣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자 럭비 국가대표 출신 서보희 심판의 시선도 같다. 서보희 심판은 "나는 운동을 못 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도 태그 하나를 떼면서 성취감을 얻는다. '내가 여기서 뭔가를 했다', '나도 이 팀의 일원이다'라는 느낌이 생긴다. 꼭 공을 들고 뛰지 않아도 자기에게 기회가 한 번 오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이 크다"고 미소 지었다.
럭비 저변 확대가 반드시 '선수 한 명 더 만들기'를 의미할 필요도 없다. 선수를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럭비를 해본 사람부터 늘리자는 접근이다. 선수로 시작하더라도 지도자와 심판, 강사 등으로 럭비 곁에 남을 수 있다.
서인수 심판은 상임 심판 제도처럼 선수 이후에도 럭비를 직업으로 이어갈 길이 있다는 점을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더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규칙을 배우는 이유 역시 경기에서 반칙하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훗날 선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럭비에 남을 가능성까지 넓혀준다.
사람들이 럭비를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입구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최강럭비: 죽거나, 승리하거나'를 보고 선수들을 찾아 지방대회까지 오는 팬도 생겼다. OK 읏맨 럭비단 양지융(26) 역시 "방송과 유튜브, 태그 럭비와 일반인 클럽을 통해 과거보다 럭비를 접할 통로가 조금씩 늘고 있다"고 반겼다.
지난달 인천 서구 하나글로벌캠퍼스에서 열린 '제3회 OK 읏맨 럭비 아카데미'는 하나의 실험장이었다. 전국의 학생 선수뿐 아니라 럭비 경험이 거의 없는 학생들도 참여했고, 규칙 교육부터 기본기 훈련, 현역 실업선수들과 만남까지 경험했다. 참가비도 받지 않았다. 특정 선수를 발굴하는 데 그치기보다 아이들이 일단 럭비공을 만져보고, 같은 종목을 하는 또래와 만나고, 럭비가 어떤 운동인지 경험할 접점을 만든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오는 10월 3일 오전 11시 서울 목동운동장 주경기장에서 펼쳐질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 럭비 경기 역시 누군가에게는 그 첫 번째 럭비가 될 수 있다. 평소 럭비를 접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타원형 공의 박진감을 직접 만날 드문 기회다. 김 감독 역시 "연고전 같은 콘텐츠가 더 있어야 사람들이 구경하고 관심을 갖는다"고 강조했다.
시작부터 꼭 거창할 필요는 없다. 연세대, 고려대처럼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서 럭비공을 잡아도 된다. 연고전을 우연히 보다가 처음 관심을 가져도 되고, 학교 체육 시간에 친구의 태그를 한번 떼어보는 것부터 시작해도 된다.
지금 한국 럭비에 필요한 것은 모든 아이를 선수가 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한 번이라도 타원형 공을 만져볼 사람을 늘리고, 그중 누군가가 '진학 때문에 시작한 럭비'를 '재미있어서 계속하는 럭비'로 바꿔 가는 것이었다.
김 감독은 "럭비는 스릴 있고 박진감이 넘치는 종목이다. 지고 있어도 뒤집을 기회가 많고, 내가 잘하지 못해도 옆 사람을 도와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종목"이라고 럭비의 재미를 소개하며 조금 더 사람들에게 친숙한 종목이 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