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신용사건 이후 같은 신용등급의 다른 기업들까지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악순환을 끊으려면 기업별 신용위험을 구분하고 자금공급 경로를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당국이 운영 중인 회사채·CP(기업어음) 매입 프로그램의 활용도를 높이는 한편 발행가격의 투명성을 높이고 투자자층을 넓혀 신용등급에 따른 투자 기피를 완화하는 것이 과제로 꼽힌다.
5일 금융당국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올해도 산업은행·기업은행·신용보증기금 등을 통한 최대 10조원 규모의 회사채·CP 매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채권시장안정펀드와 신용보증기금의 P-CBO(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 등을 포함한 채권·단기자금시장 안정 프로그램의 전체 지원 규모는 최대 37조6000억원이다.
회사채·CP 매입 프로그램은 2020년 코로나19 충격에 대응해 도입된 시장안정 조치에서 출발해 연장을 거듭해왔다. 금융위는 2023년 A1~A3급 CP와 전자단기사채(전단채)를 지원 대상에 포함하고 운영기간을 2024년 말까지 연장했다. 이후에도 프로그램을 유지했으며 지난해 12월 올해 말까지 다시 연장하기로 했다. 금융위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회사채·CP 매입 등 시장안정 프로그램 전체를 통해 비우량물을 중심으로 약 11조8000억원이 신규 매입됐다.
정책금융 지원체계가 유지되고 있지만 A3급 CP·전단채 발행잔액은 홈플러스 사태 이전보다 크게 감소했다. 시장 전체에 공급되는 유동성이 신용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기업의 자금조달 여건 개선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는 만큼 지원 효과를 세부 등급별로 살펴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자본시장연구원은 CP와 전단채의 발행·신용평가 체계를 정비하고 시장정보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특히 CP 신용평가에도 전단채처럼 발행한도를 명시해 등급을 부여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현재 신용평가사 공시를 보면 전단채는 발행한도가 별도로 표시되지만 CP는 그렇지 않은 사례가 있다. 연구원은 실제 발행가격과 신용등급별 수익률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해야 한다고도 제안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회사채 발행 위축과 CP·전단채 발행 증가에 따른 차환 위험을 경고하며 비우량 회사채의 투자수요 기반을 확충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기업의 단기자금 조달 의존도를 줄이려면 회사채 시장에서도 다양한 신용도의 기업에 대한 투자수요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단기자금시장의 정보 투명성을 높이고 거래를 표준화하는 방식으로 시장의 자금공급 기능을 개선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STEP'(유럽 단기채권 표준화 체계)을 통해 공통 기준을 충족한 단기채권의 발행액과 잔액, 발행수익률을 정기적으로 공개한다. 발행주체와 만기, 신용등급 등을 구분해 시장의 자금조달 여건을 비교할 수 있도록 한다.
국내에 정보공개 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탁결제원과 코스콤 등을 통해 CP·전단채 발행정보가 제공되고 금융투자협회와 채권평가사 등을 통해 수익률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투자자가 실제 발행가격과 만기, 신용등급별 금리를 얼마나 쉽게 비교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국제자본시장협회(ICMA)는 지난해 11월 유럽 CP 시장 발전 보고서에서 발행·가격정보 통합과 거래 표준화, 투자자층 확대를 제안했다. 분산된 정보를 통합하고 발행·결제 절차를 표준화해 거래비용을 줄이는 한편 MMF(머니마켓펀드) 관련 규제와 투자 관행을 개선해 다양한 신용도의 기업이 시장에 참여할 여건을 마련하자는 내용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신용사건의 충격이 다른 기업의 자금조달에까지 악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며 "단순히 A3급 상품 판매를 늘리는 것보다 투자자의 위험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강화하고 자금공급 경로를 다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