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국정조사 특위 2차 청문회가 열린 지난 7일 밤 국회 본청 245호. 12시간 동안 ‘모르쇠’로 일관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말을 바꿨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07년 7월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검증 청문회 당시의 유튜브 동영상을 제시하자 ‘최순실의 이름도 듣지 못했다’던 입장을 번복한 것. 동영상엔 최씨의 실명이 거론됐고 그 자리에는 김 전 실장이 있었다. 근 10년 전의 동영상이 미꾸라지처럼 청문회 질의를 빠져나가던 김 전 실장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인터넷 곳곳에 흩뿌려진 디지털 흔적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사실관계를 밝히는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으로 떠올랐다. 전·현직 청와대 의료진과 당일 호출된 미용사들의 세월호 참사 당일 디지털 흔적을 찾아보면 베일에 가려진 ‘대통령의 7시간’도 밝혀낼 수 있지 않겠냐는 지적도 나온다.
◇최순실 게이트 ‘트리거’ 된 디지털 흔적들
실제 디지털 흔적들은 최씨의 국정농단 사실관계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그 심각성을 알렸다. 우선 JTBC가 입수한 태블릿PC는 국정농단 의혹을 알리는 ‘트리거’(방아쇠)가 됐다. 해당 태블릿에 담긴 청와대 문서의 최종수정자 ID는 ‘narelo’. ‘문고리 3인방’ 중 1명인 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의 청와대 이메일 ID와 같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로 국가 주요문서를 민간인인 최씨에게 무단 유출했다는 증거가 됐다.
정 전 비서관이 박 대통령 및 최씨와 통화한 녹음 파일도 검찰수사에 결정적 도움이 됐다. 이 파일에는 최씨가 박 대통령의 해외순방 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도록 지시한 내용이 담겼다. 당시 정 비서관이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최씨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라”며 이를 종용했고 박 대통령은 12시간 후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었다.
지난 14일 박영선 의원이 공개한 녹취록은 최 씨 등이 국정농단의 증거 인멸을 지시했음을 드러냈다. 최씨의 딸 정유라씨의 경우 과거 SNS(소셜 네트워크서비스)에 “능력 없으면 네 부모를 원망해…돈도 실력이야”라는 글을 남겨 온 국민의 공분을 샀고 이는 정씨의 부정입학에 대한 조사로 이어져 고교 졸업과 이화여대 입학이 취소되기도 했다.
이렇게 디지털 흔적들이 ‘비정상의 정상화’에 일조하자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행적도 이를 통해 밝혀내자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디지털 장의사’ 때아닌 특수, 디지털 탐정사무소도 등장?
이런 상황 속에 디지털 장의사는 때아닌 특수를 맞았다. 디지털 장의사란, 개인이 원하지 않는 인터넷 기록이나 사망한 사람의 디지털 흔적을 찾아 지워 주는 서비스를 말한다. 국내 첫 디지털 장의사 서비스를 선보인 김호준 산타크루즈컴퍼니 대표는 “한 달에 250건 남짓하던 의뢰가 최순실 게이트 이후인 지난달 500건으로 증가했다”며 “이달에도 꾸준히 의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과거의 흔적뿐 아니라 곳곳에 흩어진 디지털 기기와 클라우드 데이터 등을 분석해 특정인을 실시간 감시하고 범죄를 사전방지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미국 유명 CBS 드라마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Person of Interest)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 한 IT업계 인사는 “이번 게이트를 계기로 디지털 세상 곳곳의 흔적들을 단서로 정·재계 인사들의 부정을 고발하는 ‘디지털 탐정사무소’가 부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