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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R&D(연구개발) 성과를 시장으로 옮기는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기술사업화 패러다임을 '기술이전 중심'에서 '스핀오프 기반 기업 창출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기술을 넘기는 데서 끝내지 말고, 스핀오프(spin-off, 연구소·대학이 보유한 기술·인력을 분리시켜 별도 기업으로 창업) 기업을 장기적으로 함께 키워 '글로벌 챔피언'으로 성장시키는 '랩 투 임팩트(Lab to Impact)' 체계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최치호 한국과학기술지주(KST) 대표는 26일 경북 경주 리한셀렉트에서 열린 '2026 2026 공공기술 사업화 컨퍼런스(PTC Korea)'에서 '딥테크 혁신경제 시대, 출연연의 대체불가 역할'을 주제로 이 같은 방향 전환을 제시했다. 최 대표는 유럽과 미국 국가연구소의 최신 사례를 근거로 "기술이전은 끝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며 "출연연이 벤처 빌더로 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대표는 국내 출연연 창업 생태계가 위축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가 발간한 '시그널 2026' 보고서에 따르면 연구원 창업·스핀오프는 2021년 56건에서 2025년 24건으로 5년 새 57.1% 줄었다.
같은 기간 해외 주요 국가연구소는 정반대 흐름을 보였다. 중국과학원(CAS) 생태계에서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기업) 15개 이상, 독일 막스플랑크에서 4개가 창출됐고 네덜란드 TNO, 핀란드 VTT, 프랑스 CEA-Leti도 각각 유니콘을 배출했다.
최 대표는 "국내는 단발성 기술 이전에 그쳐 계약과 동시에 관계가 끊기지만, 해외 국가연구소는 스핀오프 이후 장기 협력으로 함께 성장한다"며 "기술이전을 끝으로 보는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 대표에 따르면 이 같은 문제의식은 이미 주요국의 정책 기조로 자리 잡았다.
이를테면 유럽에서는 2024년 발표된 '드라기 보고서(유럽 경쟁력의 미래)'가 "혁신의 방식을 통째로 바꿔야 한다"며 연구 성과가 시장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현실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유럽연합 공동연구센터(EC JRC)의 2025년 보고서도 연구 성과를 이전하는 정책에서, 연구 성과로 글로벌 기술기업을 성장시키는 정책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국가연구소(RTO)를 딥테크 생태계의 핵심 엔진으로 규정했다. '랩 투 유니콘(Lab to Unicorn)' 이니셔티브를 통해 연구기관의 기술·인프라·네트워크에 창업기업이 접근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는 흐름이다.
미국도 지난 7월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의 '과학, 새로운 황금기(Science, A New Golden Age)' 정책권고를 통해 80년 만의 대전환을 예고했다. 연구와 사업화를 순차적으로 나누던 방식에서 벗어나, 연구 과정 전반에 사업화를 반영하는 '반복적 융합' 모델로 옮겨가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최 대표는 "발견을 시장으로 옮기는 '전환 역량'이 곧 국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됐다"고 강조했다.
최 대표는 국가연구소가 스핀오프 기업과 오랜 기간 협력해 세계 시장을 이끈 사례를 잇달아 소개했다. 프랑스 원자력청(CEA) 산하 전자정보기술연구소(CEA-Leti)가 대표적이다. 이곳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992년 세워진 반도체 소재 기업 소이테크(Soitec)은 30여 년간 CEA-Leti와 협력하며 반도체 웨이퍼(SOI) 시장 세계 1위로 올라섰고, 올해는 두 기관이 클린룸에 공동 연구개발 공간까지 마련했다
네덜란드 응용과학연구소(TNO)의 스핀오프 니어필드 인스트루먼트(Nearfield Instruments)는 올해 3억3000만유로(약 5331억원) 규모의 시리즈D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14억 유로(2조원)가 넘는 유니콘에 올랐다.
독일 막스플랑크는 1990년대 이후 누적 200개 이상의 스핀오프를 창출해 일자리 9500여 개, 활용수입 5억7600만유로, 유니콘 4개를 만들었으며 이들의 총합 기업가치는 670억달러(93조원)를 웃돈다. 핀란드 VTT는 양자컴퓨팅 기업 IQM을 배출했다.
최 대표는 이들의 공통점으로 '스핀백(spin-back)' 구조를 꼽았다. 연구소에서 나간 기업이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뒤 다시 연구소와 손잡고 다음 세대 기술을 함께 개발하고, 그 성과가 또 다른 창업으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그는 "국내에서도 KIST 창업기업이 다시 연구소 안으로 들어와 추가 기술이전과 글로벌 공동연구를 이어가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며 이런 선순환 구조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이 자리에서 출연연이 나아갈 방향 5가지를 제시했다. △기술이전전담조직(TLO)의 벤처 빌더 역할 전환 △스핀오프 기업과의 장기협력 선순환 체계 △실증 인프라 확충과 스핀오프 연계 △벤처빌더·기술지주·전용펀드 연결 구조 △지역 혁신클러스터 앵커기관 역할 등이다.
이런 제안의 근거로는 유럽연합 공동연구센터(JRC)가 조사한 유럽 국가연구소들의 변화를 들었다.
유럽 국가연구소(RTO)의 79%가 스핀오프 지원을 기관의 공식 임무로 인식하고, 86%는 창업 이후에도 연구개발 협력을 이어가며, 38%는 직접 벤처 빌더를 운영하고 있다. 사업화의 단위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특허나 기술 하나를 넘기는 데 그쳤다면, 이제는 연구 인력과 사업모델까지 갖춘 '투자 가능한 기업(fundable spin-off)' 형태로 시장에 내보낸다.
실증 인프라의 역할도 강조했다. 스위스 연방 재료과학기술연구소(Empa)는 연구 성과를 실제 환경에서 검증하는 실증 시설을 갖추고, 여기서 검증된 기술로 창업을 이어가 지금까지 37개 기업을 배출했다.
미국 MIT가 세운 '더 엔진(The Engine)'은 창업 기업이 값비싼 실험·제작 장비를 함께 쓰도록 해 초기 비용 부담을 덜어줬고, 이를 발판으로 핵융합 기업 커먼웰스 퓨전 시스템을 유니콘으로 키웠다. 최 대표는 "실증을 기업으로, 기업을 산업으로 전환하는 핵심 엔진이 바로 실증 인프라"라고 말했다.
기술을 시장으로 밀어줄 자본을 연결하는 일도 관건이다. 핀란드 국가기술연구센터(VTT)는 기술지주회사와 전용 투자펀드를 두고 연구소에서 나온 기업에 직접 투자해, 핀란드 전체 벤처투자액의 22%를 이 통로로 끌어들이고 있다. 중국과학원 산하 투자조직 CASVC는 650개 기업에 투자해 이 가운데 유니콘 15개와 상장기업 16곳을 키워냈다. 최 대표는 "기술과 자본, 시장이 순서대로 이어달리는 게 아니라 함께 달리는 구조라야 딥테크 챔피언이 나온다"고 말했다.
최 대표는 성과 측정 방식의 전환도 주문했다. 그동안 '기술을 얼마나 이전했는가'로 성과를 재왔다면, 앞으로는 '어떤 기업과 산업을 만들었는가'로 측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이 유니콘 대신 고용 규모와 공급망 참여 기업 수, 밸류체인 형성 등을 반영한 '페가수스(Pegasus)' 지표를 도입한 점도 근거로 들었다.
법적 근거도 이미 마련돼 있다고 봤다. 정부출연연구기관법과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 기술이전·사업화 촉진과 연구성과 활용을 출연연의 책무로 규정하고 있는 만큼, 연구로 끝내지 말라는 것이 법의 요구라는 것이다. 국가연구소의 책임 범위도 기초연구를 넘어 실증·검증·파일럿(기술성숙도 TRL 4~7단계)까지 넓혀야 한다고 제언했다.
최 대표는 "출연연은 2030년까지 국민 체감 성과 100개를 만들어야 하는 데 현재 30개 수준"이라며 "속도 패권 시대에 전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