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제약·바이오 전문매체 '파마보드룸'(Pharma Boardroom)이 약 7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국내 다수 기업과 만나 약 40건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파마보드룸은 화이자와 로슈 등 글로벌 빅파마(대형제약사)와 산업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블룸버그터미널에 리포트(보고서)를 유통한다. 한국 기업 리포트 발행은 2019년이 마지막이다. 파마보드룸은 왜 지금 한국 바이오를 다시 찾았을까.
율리아 루카이티테 파마보드룸 아시아 헤드(이하 루카이티테 헤드)는 한국을 다시 찾은 이유로 K-바이오의 글로벌 위상 강화와 연구개발(R&D) 성과, 정책 및 시장 접근성의 변화 등을 꼽았다. 특히 신약 파이프라인의 다양성과 과학기술 수준의 발전, 바이오의약품 대량생산 역량이 매우 빠르게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이제 한국 바이오 기업을 글로벌 시장에서 재조명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내년 1분기부터 한국 기업 리포트를 발간할 계획이다.
"한국, 신약 경쟁력 우수…글로벌 혁신 중심지"
7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파마보드룸의 루카이티테 헤드는 8일 머니투데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K-바이오가 세계적인 수준의 신약 파이프라인을 보유했다고 호평했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2019년 한국 바이오기업은 줄기세포와 재생의료 분야에 관심이 많았지만, 지금은 항체-약물접합체(ADC)와 이중항체, 표적치료제, 인공지능(AI) 기반 신약 등 혁신적인 파이프라인을 두루 보유했다"며 "글로벌 신약 파이프라인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급격히 커졌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개발 중인 신약 후보물질의 약 14%를 차지하며, 세계 최상위권이자 아시아·태평양 지역 선두"라며 "한국 신약 파이프라인의 상당수는 계열 내 최초(First-in-Class) 또는 계열 내 최고(Best-in-Class) 신약으로 개발될 잠재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한국의 임상시험 경쟁력과 상업화 성과에도 높은 점수를 줬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서울은 여전히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임상시험이 진행되는 도시로 경쟁력이 뛰어나다"며 "다만 베이징과 같은 임상시험 허브와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어 한국의 제약·바이오 업계와 규제기관이 경쟁 우위를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어떤 혁신을 추진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한국이 초기 연구개발(R&D) 중심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서 실질적인 상업적 성과를 창출하는 단계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며 "글로벌 신약 혁신의 중심지 중 하나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구체적으로 SK바이오팜과 에이비엘바이오 등의 성과를 언급했다. SK바이오팜이 뇌전증 신약 '엑스코프리'를 미국에서 블록버스터(연간 매출액 1조원 이상의 의약품)로 키우며 K-바이오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고 봤다. 또 에이비엘바이오를 비롯한 국내 바이오텍(바이오기술기업)이 확보한 수십억달러 규모 글로벌 기술이전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했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또 실제 한국 바이오산업을 보는 글로벌 시장의 시각이 극적으로 달라졌단 사실을 실감한다고 강조했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과거 글로벌 제약업계는 한국을 복제약이나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중심의 시장으로 인식했다"며 "하지만 이제 최첨단 혁신의 실질적인 원천으로 인정하고, 새로운 모달리티(치료접근법)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신약 후보물질과 기술을 발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의 과학기술이 엄격한 연구에 기반하며, 창의성이 매우 높다고 평가한다"고 덧붙였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유럽에서도 K-바이오에 대한 인식이 개선됐다고 전했다. 그는 "K-바이오에 대한 유럽의 관심 수준을 5점 만점에 4점으로 평가하고 싶다"며 "로슈와 노바티스, 아스트라제네카 같은 유럽의 주요 제약기업도 한국 바이오텍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고, 수십억달러 규모의 계약과 전략적 제휴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단계"라고 말했다.
"후기임상 검증이 최우선 과제…M&A·IR 전략도 고민해야"
루카이티테 헤드는 K-바이오가 앞으로 10년간 글로벌 위상을 더 높이기 위한 최우선 과제로 후기 임상에서 검증이 필요하단 점을 꼽았다. 또 한국 기업 간 M&A(인수합병)를 확대하고 글로벌 자본시장과 소통을 강화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높은 잠재력을 지닌 K-바이오의 과학기술 플랫폼을 글로벌 후기 임상에서 성과로 검증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초기 단계 플랫폼 기술의 기술이전에서 더 나아가 한국 기업이 자체 보유한 신약 후보물질을 글로벌 2~3상까지 직접 개발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완전한 상업적 가치를 확보해야 비로소 글로벌 시장에서 확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한국 바이오 생태계의 가장 취약한 연결고리는 기업 간 M&A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라며 "잠재력을 갖춘 수많은 중소 바이오텍이 서로 합병하거나 힘을 합치면 규모를 키워 글로벌 시장과 격차를 좁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K-바이오의 약점 중 하나로 성장 단계 기업의 자금조달 공백을 지적했다. 실제 국내 많은 바이오텍이 자금조달 문제로 임상시험 투자뿐 아니라 운영자금을 확보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한국 정부는 초기 바이오벤처에 상당한 규모의 지원을 제공하지만, 글로벌 임상 시험에 진입한 많은 바이오텍이 투자유치 접근성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며 "해외 투자를 유치하는 방안이 대안이 될 수 있는 만큼 글로벌 자본시장과 소통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특히 한국 바이오텍은 기업의 가치를 글로벌 시장에 전달하는 역량에서 글로벌과 격차가 있다"며 "한국에 600개 이상의 바이오텍이 활동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글로벌 시장에서 인지도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구현하는 역량도 중요하지만, 기업의 기술과 성장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스토리텔링, 투자자 관계(IR) 전략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내년 1분기 8년 만에 한국 기업 리포트 발간을 앞두고 K-바이오의 CDMO(위탁개발생산)와 바이오시밀러, ADC, AI, 세포·유전자 및 중추신경계 질환 치료제, 오가노이드(인공장기) 등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다루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실제 파마보드룸은 올해 하반기 SK바이오팜과 유한양행, 바이젠셀, 메디포스트, 알지노믹스 등 국내 다수 제약 및 바이오 기업과 만났다.
루카이티테 헤드는 "K-바이오의 연구 및 상업화 성과를 전 세계 80만명 이상의 파마보드룸 독자에 전달할 예정"이라며 "내년에 이어 또 7년 뒤 한국 보고서를 발간한다면, 그땐 더 많은 한국 기업이 글로벌 상위 50위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