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엔비디아는 할 일이 많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최근 한국을 찾을 때마다 강조한 메시지다. 황 CEO는 지난 6월 방한 당시 한국을 떠나면서도 "곧 다시 돌아오겠다. 한국에서 할 일이 많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엔비디아와 한국 기업들의 협력은 반도체를 넘어 데이터센터·자동차·로봇·스마트팩토리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코리아소사이어티 연례 갈라에서 황 CEO가 한미 우호 증진에 힘쓴 인사에게 수여하는 밴플리트상을 받은 것은 이 같은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코리아소사이어티는 황 CEO의 AI·반도체 분야 리더십뿐 아니라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LG전자·네이버 NAVER·두산 등과 구축한 협력관계를 수상 배경으로 제시했다.
황 CEO는 이날 수상 소감에서 "한국은 기술을 소비하고 수출하는 능력을 동시에 갖췄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나라"라며 "전체 인구로 보면 작은 나라지만 AI와 자동화를 활용하면 체급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작은 인구라는 한계를 넘어 야망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단순한 부품 공급자를 넘어 엔비디아의 주요 파트너로 자리매김했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최대 협력 축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다. 두 회사는 엔비디아 AI 가속기의 핵심 메모리인 HBM을 공급하는 동시에 차세대 메모리 개발에서도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수년 단위의 장기 메모리 공급 및 기술 협력을 추진 중이다. 삼성전자와의 관계도 HBM(고대역폭메모리) 공급을 넘어선다. 양사는 AI를 반도체 설계와 제조 공정에 직접 적용하는 'AI 팩토리' 구축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엔비디아의 가속 컴퓨팅과 디지털 트윈 기술을 결합해 반도체 R&D(연구개발)부터 생산라인까지 AI를 전면 투입하는 구조다.
현대차그룹은 엔비디아의 AI를 자동차와 로봇이라는 물리적 세계로 확장하는 역할을 맡는다. 자율주행뿐 아니라 스마트팩토리와 로봇 개발에 엔비디아의 AI 플랫폼을 적용하고 있다. LG 역시 휴머노이드 로봇과 데이터센터 등 물리적 AI 영역으로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네이버는 AI 모델과 클라우드·데이터센터를 연결하는 축이다. 지난 7월 엔비디아와 캐나다 브룩필드로부터 총 100억달러 규모의 투자 약정을 확보해 국내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업계에선 엔비디아와 한국 기업의 관계가 'GPU(그래픽처리장치)를 사고 HBM을 파는 관계'를 벗어났다는 얘기가 나온다. 엔비디아가 GPU와 AI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제공하면 한국은 HBM과 반도체 제조기술, 통신망, 데이터센터, 자동차, 로봇, 전자제품을 결합한다. AI가 가상공간을 넘어 공장과 자동차, 로봇을 움직이는 '피지컬 AI'로 진화할수록 이 결합의 경제적 가치는 커질 전망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이날 황 CEO의 수상을 축하하며 "70년 전 밴플리트 장군이 전장에서 한미동맹을 만들었다면 70년이 지난 오늘에는 황 CEO가 최전선에 서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군사 안보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미동맹이 이제 반도체와 AI라는 첨단 산업 현장에서 새로운 협력 구조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날 현장을 찾은 한 재계 인사는 "안보·통상 넘어 AI와 반도체, 제조를 매개로 한 기술 동맹이 한미 협력의 새로운 지형을 그리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