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영, 시대를 관통하고 세월을 초월한 존재

한수진 ize 기자
2025.03.05 08:30
이혜영 / 사진=NEW

배우 이혜영은 시대를 관통하고 세월을 초월하는 존재다. 후배들에게 더없는 존경을 받고 대중에겐 끝없는 사랑을 받는다. 최근 베를린영화제에서 휘날린 은발 머리카락은 세월을 거스르는 배우로서 존재감을 다시금 증명했다.

카메라 앞과 무대 위에서 44년을 보낸 이혜영은 이제 단순한 배우 타이틀을 넘어 한국 영화와 연극, 드라마가 공유하는 한 시대의 상징이 됐다. 그는 곧 ‘여성 서사’의 또 다른 이름이며, 존재 자체로 한국 여성 배우들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는 개척자다.

이혜영 / 사진=NEW

영화 ‘파과’·연극 ’헤다 가블러’ 등, 60대에도 계속되는 도전

60대 중반에도 이혜영은 분주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더 넓고 뿌리 깊게 영향력을 확장한다.

이혜영은 지난 2월 주연을 맡은 영화 ’파과’로 1985년 영화 ‘땡볕’ 이후 40년 만에 베를린영화제 레드카펫을 다시 밟았다. ‘유례없는 60대 여성 킬러’라 불리는 이혜영의 ‘파과’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신성방역에서 40년간 활동해 온 레전드 킬러 조각(이혜영)과, 그를 쫓는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김성철)의 숨 막히는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영국의 영화 전문 매체 스크린데일리(Screen Daily)는 ‘파과’를 두고 “60대 주인공 캐릭터는 영화계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인상적”이라고 평가했고, 미국의 엔터 및 영화 전문 매체 더 할리우드 리포터(The Hollywood Reporter)는 "나이 듦의 외로움에 대한 명상을 그린 액션 영화"라고 극찬했다. 이 같은 호평의 중심에는 이혜영의 독보적인 연기가 있다. 첨예하게 쌓은 카리스마와 섬세한 감정선을 아우른 그만의 연기로 말이다.

연극 복귀도 이혜영의 존재에 미더움을 불어넣는다. 그는 2017년 '메디아' 이후 8년 만에 국립극단 연극 ‘헤다 가블러’로 무대에 오르며 연극배우로서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이혜영은 매체 연기로도 유명하지만 80대 관록의 신구와 박정자와 함께 동아연극상에서 최다(3회) 수상했을 정도로 무대에서도 강한 배우다.

2012년 명동예술극장에서 박정희 연출로 초연됐던 '헤다 가블러'는 헨리크 입센이 1890년 발간한 희곡이다. 남편의 성을 거부하고 자신의 성인 가블러로 살아가는 여주인공 헤다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혜영은 2012년 초연 때 헤다를 연기했고 이번에도 같은 역할로 돌아온다. 13년의 세월이 더해진 이혜영의 헤다는 더 깊어진 내면 연기와 성숙한 해석이 기대된다.

이혜영 / 사진=블루드래곤엔터테인먼트

천생 배우 이혜영, 운명처럼 뛰어들었고 인생 바쳐 끌어안은 연기

청년 때부터 노년까지 활약하고 있는 여성 배우가 이혜영이 유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게 더 많은 찬사가 쏟아지는 건 걸어온 족적의 특별함이다.

이혜영에게 배우의 길은 필연이었다. 영화감독 이만희의 딸로 태어나 배우였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성장한 그에게 연기란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1년,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첫 무대에 올랐고, 이후 그는 카메라 앞에서, 무대 위에서 타고난 재능과 열정으로 늘 뜨겁게 숨 쉬었다.

이혜영에게 연기는 일상이자 삶의 연장선이 되어 40여 년간 쉼 없는 진화를 안겨줬다. 단순한 직업이 아닌 존재의 방식으로 연기를 받아들인 그는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며 변주를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없는 고유한 예술적 색채를 구축했다.

그가 배우로 막 걸음 뗐던 1980년대 한국 영화는 여성 캐릭터를 남성 캐릭터에게 의존하거나 순종적인 모습으로 그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달랐다. 이혜영에게 백상예술대상 신인여우상 안겨준 ‘여왕벌’(1986)의 미희는 첫사랑에 주저앉지 않고 다른 여성을 보호하며 복수를 택했다. 욕망을 탐하고 배반에 응징을 가하는, 능동적이고 자아가 강한 여성들을 연기했다.

공개를 앞둔 ‘파과’와 ‘헤다 가블러’도 마찬가지다. 이혜영이 연기하는 순간, 그 캐릭터는 무엇보다 강렬하고 누구보다 격렬하게 심장 뛰는 존재가 된다. ‘파과’의 조각은 60대 여성 킬러라는 설정만으로 고정 관념을 비틀고, ‘헤다 가블러’의 헤다는 시대적 억압에도 존엄을 지키려 한 강인함이 있는 캐릭터다. 두 캐릭터 모두 사회가 규정한 틀을 깨고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이 작품들이 몹시나 기다려지는 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혜영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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