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상장의 유령이 SK하이닉스를 덮쳤다. 미국 eSSD(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 전문 자회사 솔리다임(옛 인텔의 낸드사업부)의 나스닥 상장(IPO) 추진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삼전닉스' 주가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터라 눈초리는 더 매섭다. 회사의 핵심 자산을 별도로 상장해 새 투자자를 유치함으로써 기존 주주가 손해를 본다는 주장인데 성장을 위해 필요하다는 반론도 만만치않다. 반복되는 중복상장 논란의 경우 구체적인 사례별로 면밀히 따져 옥석을 가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회사의 중요 자산을 떼어내 별도 법인으로 상장하는 것이 전형적인 중복상장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솔리다임 IPO는 다르다. 핵심 성장사업을 분리한 뒤 별도 상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수한 해외 자회사를 현지에서 상장하는 수순이다. 인텔 등 글로벌 테크기업들이 해왔던 방식이기도 하다.
SK하이닉스의 근간을 떼는 일도 아니다. LG에너지솔루션의 상장 직전인 2021년 기준 LG화학에서 LG에너지솔루션 관련 사업이 차지하는 매출·자산 비중은 40%대였지만 솔리다임은 그 비율이 10% 미만이다.
더욱이 중요한 건 '지분율'이란 숫자보다 '지분의 가치'다. 모회사 지분이 희석되더라도 상장을 통해 조달한 자금으로 적기 투자가 진행되면 SK하이닉스와 솔리다임의 성장성이 커지고 결과적으로 주주의 주식가치는 증가한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SK하이닉스에 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솔리다임의 기업 가치도 재평가 받을 수 있다. AI(인공지능) 서버 수요가 폭증하면서 eSSD 시장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외신 등에 따르면 불과 90억달러에 인수했던 솔리다임의 상장 후 가치는 1000억~1500억달러로 추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상장'이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자체 자금이나 차입으로 투자해도 되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반도체 산업의 판이 바뀌고 있다. HBM(고대역폭메모리)과 D램, 낸드 등에 동시다발적 대규모 투자가 절실하다. SK그룹이 올 들어 발표한 투자 계획만 고려해도 중장기적으로 무려 1000조원 이상을 조달해야 한다. 보유 현금은 물론 IPO와 회사채 발행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 최적의 조합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 기업에 중복상장 프레임을 씌워 옴짝달싹 못 하게 하면 중국만 웃을 수 있다. 삼전닉스의 생산능력이 수요를 못 따라가면서 그 틈을 중국 업체가 파고들어 입지를 넓히고 있기 때문이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존 사업부를 떼어내 상장한 일반적인 쪼개기 상장과 달리 솔리다임은 인텔의 낸드·SSD(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 사업을 인수해 출범한 해외 사업이라는 점에서 출발점이 다르다"며 "AI 반도체 경쟁에서는 투자 속도와 자금조달의 유연성이 중요한 만큼 상장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조달 자금의 활용과 기존 주주가치 제고 여부를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