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현장 경영을 이어가며 첨단 반도체 패키징 경쟁력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각에서 AI(인공지능) 산업의 수익성을 우려하면서 투자 거품론을 말하고 미국 중간선거 민주당 선거 승리에 따른 AI 규제 강화 불안감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AI 중심의 산업 재편이라는 큰 흐름은 돌이킬 수 없다는 확신 속에 선제 투자와 기술 확보에 나서는 것으로 풀이된다.
5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AI 인프라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금의 수익성을 둘러싸고 시장의 경계감이 커지고 있지만 산업의 성장세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AI 서비스 확산으로 데이터 처리량과 연산 수요가 기하 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올해 세계 AI 지출이 전년 대비 49.5% 증가한 2조6705억 달러(약 3585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단기적인 시장 변동성과 별개로 고성능 반도체 수요에 대비한 선제 투자가 중요해지는 배경이다.
AI 반도체 수요가 확대되면서 성능을 높이기 위한 기술 경쟁도 달라지고 있다. 회로 미세화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공정이 고도화될수록 개발 난도와 비용 부담이 커진다. 특히 AI 가속기는 GPU(그래픽처리장치)의 연산 능력이 높아져도 HBM(고대역폭메모리)에서 데이터를 충분히 빠르게 공급하지 못하면 전체 성능이 제한된다. GPU와 HBM 등 서로 다른 칩을 고밀도로 연결해 데이터 전송 속도와 전력 효율을 높이는 첨단 패키징이 핵심 기술로 부상한 이유다.
삼성전자에는 이러한 변화가 사업 역량을 결집할 기회이자 과제다. 삼성전자는 HBM을 생산하는 메모리와 AI 가속기용 로직 반도체를 제조할 수 있는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 사업을 모두 갖추고 있다. 다만 개별 기술만으로는 경쟁력이 보장되지 않는다. 칩 간 연결과 발열, 전력 소모를 고려한 설계는 물론 고객이 요구하는 성능과 양산 수율까지 확보해야 한다. 이 역량들을 제품 경쟁력으로 연결하는 것이 관건이다.
삼성전자는 패키징 역량을 실제 양산 경쟁력으로 연결하기 위해 생산시설 투자와 선행 기술 개발을 병행하고 있다. 충청권에서는 HBM 후공정 양산 기반을 확대하고 해외에서는 새로운 소재·공정 기술 확보하는 전략이다. 이 회장은 6월 천안에서 HBM 현황을 점검한 데 이어 온양 착공식을 통해 신규 생산시설 투자까지 직접 챙기게 됐다.
해외 거점을 챙기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 회장이 지난 1일 일본 요코하마 첨단 패키징 연구거점 APL(어드밴스드 패키지 랩)을 찾은 것도 이런 기술 개발 현황을 점검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는 2024년부터 5년간 이곳에 400억엔(약 3500억원)을 투자해 웨이퍼 본딩과 유리기판 등 차세대 기술을 연구한다. 일본의 우수한 소재·부품·장비 생태계를 활용해 향후 고성능 반도체에 필요한 패키징 기술을 확보한다는 구상이다.
이 회장의 잇따른 현장 방문은 AI 산업의 장기 성장에 대비해 생산능력과 차세대 기술을 동시에 확보하려는 행보로 풀이된다. 반도체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만큼 시장 확대에 앞서 기반을 갖추겠다는 전략이다. 반도체뿐 아니라 차세대 성장동력 전반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감지된다. 지난달 회장 취임 4주년을 맞은 이 회장은 서울 우면동 연구개발센터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기술 개발 현황도 점검하며 차세대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현장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의 현장경영 확대는) 늘 위기를 강조했던 이건희 선대회장처럼 반도체 호황에 취해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정신무장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선제적 투자를 통해 차세대 반도체 기술 주도권을 확실히 쥐겠다는 결단"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