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기업의 조건[기고/안도걸]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
2026.08.27 04:00

잘 버는 기업에서 투자 잘하고 잘 나누는 초일류 기업으로

100년 기업도 영원하지는 않다. 1892년 출범한 GE는 한때 미국 산업의 상징으로 세계를 호령했지만, 금융사업 확대와 대형 인수합병 등 자본배분의 판단 오류가 누적되면서 결국 사업 재편과 분할의 길을 걸었다. 기업의 흥망은 결국 자본을 어디에,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달려 있다. 기업의 역사는 곧 '자본배분의 역사'다.

최근 한국 기업의 경영 패러다임에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됐다. SK하이닉스는 약 40조 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소각하고 2025~2027년 누적 잉여현금흐름(FCF)의 50% 이상을 주주에게 환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삼성전자 역시 110조 원이 넘는 규모의 새로운 주주환원 프로그램과 FCF의 50% 수준을 환원하는 방안을 밝혔다.

글로벌 초일류 기업들은 이미 자본배분을 경영의 핵심 원칙으로 삼고 있다. 애플은 올해 1,000억 달러의 추가 자사주 매입을 승인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최근 한 분기에 자사주 매입과 배당으로 102억 달러를 환원했다. 엑손모빌과 셰브론도 사업 재투자, 배당, 재무건전성, 자사주 매입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정해 자본을 배분한다.

돈을 버는 원칙만큼 '번 돈을 쓰는 원칙'이 분명하다. 잘 버는 능력만큼 잘 쓰는 능력이 중요하다. '자본배분(Capital Allocation)'은 단순한 주주환원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이익을 내일의 경쟁력으로 바꾸는 기업의 생존전략이자 지속가능경영의 핵심이다.

이제 우리 기업도 'FCF 배분 원칙'을 세워야 한다. 기업이 창출한 현금을 미래투자와 주주환원, 근로자 보상과 재무안정에 어떤 원칙과 우선순위로 배분할 것인지 중장기 기준을 마련하고 시장과 약속하는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하나의 가이드라인으로 '40:40:20 자본배분 모델'을 제안한다. FCF의 40%는 AI·차세대 반도체·R&D 등 미래 먹거리에 과감하게 재투자해 성장의 엔진을 키우고, 40%는 안정적인 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을 통해 주주와 성장의 과실을 공유하는 것이다. 나머지 20%는 근로자 성과보상과 재무안정에 활용해 핵심인재에게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면서 경기침체와 공급망 충격에 대비한 완충력을 확보한다.

모든 기업에 40:40:20을 획일적으로 적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성장기업과 성숙기업이 같을 수 없고, 반도체와 금융, 에너지 산업의 투자주기도 다르다. 성장단계와 산업 특성, 투자수요와 재무구조에 따라 적정 비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원칙과 예측 가능성이다. 기업이 향후 3~5년 동안 창출하는 FCF를 어떤 우선순위와 기준에 따라 배분할 것인지 '자본배분 로드맵(Capital Allocation Roadmap)'을 마련하고 정기적으로 시장과 소통하는 것을 대한민국 기업경영의 뉴노멀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기업가치는 이익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똑같이 돈을 벌어도 수익성 높은 미래사업에 투자하는 기업과 금고에 쌓아두는 기업, 무리한 M&A에 사용하는 기업의 미래가치가 같을 수 없다. 결국 자본배분의 예측 가능성이 기업가치를 결정한다. 자본배분 로드맵은 자본효율성을 높이고 자본비용을 낮추는 경영혁신 전략이다.

이를 기업경영의 새로운 관행으로 정착시키면 크게 세 가지 변화가 가능하다.

첫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일 수 있다. 기업이 FCF와 연계한 투자·환원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면 투자자는 기업이 벌어들인 돈이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할 수 있다. 불확실성이 줄어들면 시장의 신뢰가 높아지고 자본비용은 낮아진다. 결국 자본배분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이 기업가치 상승으로 이어진다.

둘째, 경영진의 책임경영과 자본효율성이 높아진다. 막대한 현금을 금고에 쌓아두거나 수익성이 불확실한 M&A에 투입하는 대신 투자와 환원의 성과를 시장에 설명하고 평가받게 된다. 단순히 돈을 많이 확보하는 경영에서 한정된 자본을 가장 생산적인 곳에 배치하는 경영으로 바뀌는 것이다.

셋째, 경기순환 산업의 지속가능성도 높아진다. 반도체처럼 업황 변동성이 큰 산업은 '기본배당+변동환원' 체계를 마련하면 불황기에는 투자 여력과 재무건전성을 지키고, 호황기에는 늘어난 FCF를 특별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소각으로 공유할 수 있다. 호황의 과실을 나누면서 불황을 견딜 체력까지 확보하는 것이다.

자본배분 혁신은 개별 기업의 경영전략을 넘어 대한민국 돈의 흐름까지 바꿀 수 있다. 기업이 성장하고 그 성과가 배당과 자사주 소각을 통해 국민에게 돌아간다면 가계자금이 부동산에만 몰릴 이유도 줄어든다. 주식·펀드·연금으로 들어온 국민의 장기자금은 다시 혁신기업의 성장자본이 된다. 기업 성장, 성과 공유, 국민자산 증가, 장기투자 및 기업투자 확대라는 '생산적 금융'의 선순환을 만들어야 한다.

정책도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장기투자를 유도하는 세제 인센티브를 강화하고 퇴직·개인연금의 장기투자를 활성화해 국민이 기업 성장의 과실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자본시장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K-반도체에서 시작된 변화가 자동차·조선·방산·바이오·AI 등 대한민국 대표기업 전반으로 확산돼야 한다.

이제 초일류 기업을 평가하는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얼마나 많이 버느냐'만큼 '번 돈을 얼마나 생산적으로 투자하고 합리적으로 배분하느냐'가 중요하다. 잘 버는 기업에서 잘 투자하고, 잘 나누는 기업으로 가야 한다. 돈을 배분하는 능력이 기업의 미래를 만든다.

'자본배분 로드맵'을 대한민국 기업경영의 새로운 뉴노멀로 정착시키자. 기업에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주주에게는 성장의 과실을 나눠야 한다. 또한 국민에게는 자산증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새로운 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잘 벌어 잘 투자하여 잘 나누는 기업이 오래 살아남는다. 이것이 100년 기업을 만들고,'코리아 프리미엄' 시대를 여는 기업경영과 자본시장 혁신의 다음 단계다.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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